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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11 15:36 수정 : 2017.02.11 16:16

그동안 부당하게 ‘실패’로 기록되곤 했던 원더걸스의 지난 10년의 ‘도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한다. 원더걸스는, 그 정도의 경의 어린 작별인사를 받아 마땅한 팀이니까.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원더걸스를 보내며

그동안 부당하게 ‘실패’로 기록되곤 했던 원더걸스의 지난 10년의 ‘도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한다. 원더걸스는, 그 정도의 경의 어린 작별인사를 받아 마땅한 팀이니까. <한겨레> 자료사진

원더걸스의 해체 소식을 듣고 제일 처음 떠올렸던 건 얄궂게도 그들이 호스트로 출연했던 티브이엔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코리아>였다. 4인조 밴드 체제로 팀을 개편해 <리부트>(2015) 앨범을 발표한 직후였는데, 쇼는 원더걸스의 오늘이나 앞으로의 미래보다는 그들의 과거에 더 초점을 맞췄다. 아이돌 그룹에서 4인조 밴드로의 콘셉트 변화는 멤버들이 데스메탈이나 가스펠, 농악 버전 ‘텔 미’를 부르다가 타깃 팬덤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의 ‘원더풀 체인지’로, 미국 진출 실패와 팀의 위상 변화는 미국 활동 기간 동안 ‘군통령’(군인들에게 대통령 수준의 충성도 높은 지지를 받는 여자 가수) 자리를 소녀시대에게 빼앗기고는 그 자리를 되찾기 위해 초라한 오늘을 견디며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의 ‘제5군통령’으로 패러디 되었다. 이 두 코너는 그 무렵 사람들이 원더걸스를 바라보던 시선을 냉정하게 요약하고 있었다. 복고 콘셉트에 머물러 있다가 때를 놓친 팀, 혹은 미국 진출 탓에 정상에서 수렁으로 빠져들어간 팀. 그들의 디스코그래피를 꾸준히 함께 따라온 리스너들과 코어 팬들이었다면 몹시 서운하고 불쾌했을 법한 묘사였겠지만, 두 코너는 인터넷에서 ‘역대급 자학 개그’라는 평을 받으며 회자됐다.

미국 진출이 실패일까?

얼핏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평가는 아니다. 아무리 좋은 경험이었다 이야기해 봐도 미국 진출이 실패였다는 사실은 가려지지 않았고, 조나스 브러더스의 전미 투어 콘서트에 동행하는 동안 국내 활동을 거의 못 한 탓에 팬덤의 규모는 눈에 띄게 축소됐다. 기나긴 미국 활동 중 자신들의 입장을 이야기할 기회였던 문화방송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조차, 소속사 대표 프로듀서이자 미국 진출 프로젝트의 입안과 집행을 맡은 박진영이 함께 나온 탓에 자신들의 입장만으로 온전히 채울 수는 없었다.

미국 활동 중 선미가 팀을 떠나자 그 자리에 대중과 낯을 익힐 틈도 없었던 혜림을 투입한 소속사의 결정은 팀과 팬덤 사이의 유대감을 적잖이 흔들었으며, 미국에서 돌아와 발표한 ‘비 마이 베이비’나 ‘라이크 디스’는 곡의 준수한 완성도나 음원 차트를 휩쓰는 성과에도 ‘텔미’·‘소 핫’·‘노바디’로 이어지는 이른바 ‘레트로 3부작’ 시절 거둔 압도적인 성과에 비하면 다소 맥이 빠지는 게 사실이었다. 2007년 현아가 탈퇴한 빈자리를 유빈의 합류로 메우고, 2010년 선미의 활동 중단을 혜림의 합류로 메우는 식으로 그나마 유지되어 왔던 5인조 그룹이라는 형태는, 리더 선예의 결혼과 출산, 소희의 연기자 활동이 이어진 2013년에 들어서는 유지가 불가능해졌다. 레트로 3부작 시절을 기준으로 원더걸스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원더걸스는 안타깝지만 ‘미국 진출 실패 후 예전만 못해진 팀’이었다.

하지만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평가다. 같은 해에 데뷔한 라이벌 소녀시대가 멤버 한 명의 이탈을 경험했을 뿐 8인 체제로 10주년을 맞이하는 동안, 원더걸스는 한국 아이돌 그룹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과격한 멤버 로테이션을 경험하며 10주년에 도착했다. 급격하게 바뀐 건 멤버 구성만이 아니다. 처음 데뷔할 때만 해도 원더걸스는 걸스힙합에 기반한 ‘센 캐릭터’투성이 그룹이었다. 남자친구의 거짓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냉소하며 따져 묻는 주인공을 내세운 데뷔곡 ‘아이러니’로 출발한 팀의 정체성은, 그러나 ‘텔 미’의 성공 이후 급격하게 1960~80년대 미국 흑인음악을 복각하는 레트로 그룹으로 바뀌었다.

한국 복귀 후 다시 ‘라이크 디스’로 걸스힙합을 시도했던 원더걸스는, 4인조 밴드로 재구성하면서 신스 팝과 뉴 질 스윙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팝 밴드로 선회했다. 중국과 미국, 일본 진출에 도전하느라 팀이 지난 10년 중 국내에서 온전히 활동한 시간은 고작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 확보한 팬덤에 지탱한 채 그 잦은 멤버 교체와 좌절, 팀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바뀌는 콘셉트 변화를 두차례나 겪고도 10년을 살아남았다. 이런 여성 아이돌 그룹은 지금으로선 원더걸스가 유일하며, 앞으로도 쉽게 나올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이 미국 진출 실패라고 무신경하게 요약하는 원더걸스의 역사는, 오히려 그들이 얼마나 독보적인 그룹인가를 반증하는 기록인 셈이다.

원더걸스의 해체 소식에 사람들이 아쉬움을 느끼는 지점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레트로 3부작 이후 미국 진출이 없었다면 지금의 원더걸스는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그때와 같은 영화가 끝내 다시 오지 않았음을 아쉬워할 것이지만, 그들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봤던 이들이라면 전혀 다른 지점에서 깊은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4인조 밴드로 재편한 직후 발매한 <리부트> 앨범은 국내외 평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타이틀곡은 여전히 박진영이 써준 ‘아이 필 유’였고, 멤버들의 연주는 예은을 제외하면 그리 잘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앨범은 그저 콘셉트 놀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었다. 80년대 신스 팝을 즐겨 듣던 팝 매니아들이 탄복할 만한 지점들을 정확히 짚어 공략함으로써 아이돌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며 팀의 정체성을 완전히 재정의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미국 활동 기간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음악을 접하고 셀프 프로듀싱의 역량을 키운 예은의 존재는 팀의 음악적 역량을 함부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1년 뒤인 2016년 발매한 싱글앨범 <와이 소 론리>는 박진영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 온전히 자신들의 색깔로만 홀로서기에 성공한 싱글이었고, 동시대 가장 흥미로운 여성 그룹으로 또 다른 10년을 그려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해준 작품이었다. 이러한 최근 행보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이라면, 4인조 밴드로서 한창 다시 흥미로워지고 있던 순간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게 못내 안타깝고 서운할 것이다.

‘아이러니’로 데뷔…‘텔미’로 성공
09년 미국행 뒤 ‘레트로그룹’ 변신
국내 복귀 뒤엔 4인 밴드로 재구성
멤버 교체·정체성 변화하면서도 ‘진화’
프로듀서 박진영 그늘에서 벗어나
“흥미로워지려는” 순간 ‘마침표’
10주년 맞춰 마지막 싱글 발표
각자 온전한 아티스트로 새출발

그러나 곱씹어 보면 이 또한 납득이 가는 결말이다. 원더걸스는 초라한 오늘 때문에 등 떠밀리듯 마지못해 퇴장한 것이 아니라, 멤버 각자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미래를 주체적으로 선택한 결과 해체를 결정한 것이다. 팀이 평단의 극찬 속에 다시 상승 곡선을 탔음에도 말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원더걸스가 더는 박진영의 페르소나도 ‘국민 걸그룹’도 아닌, 온전히 자력으로 팀의 향방을 결정짓고 집행할 수 있는 주체적인 아티스트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해서 원더걸스의 마지막 싱글인 ‘그려줘’가 팀의 데뷔 10주년인 2월10일에 정확히 맞춰 발표된 것은 몹시 의미심장하다. 마침표를 찍는 시기까지, 원더걸스는 상황에 떠밀린 게 아니라 고심해서 선택함으로써 지름 10년짜리 거대한 원을 완성한 것이다. 팀으로서 원더걸스의 역사는 여기서 마무리될지 몰라도, 네 멤버는 이제 각자 온전히 주체적인 아티스트로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의 오랜 유년기는 스스로 내린 선택으로 이렇게 끝났다.

“흐려지지 않을 거야”

“수많은 그림 속에 담긴 너와 내 스토리. 그 순간들 잊지 않고 기억해, 우리. 둘이서 물들인 색채는 진해져만 가. 흐려지지 않을 거야 절대.” 예은과 유빈이 함께 쓴 ‘그려줘’의 가사에서, 원더걸스는 지난 10년을 함께 걸어온 이들이 기록한 색깔들은 진해져 갈 뿐 절대 흐려지지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이를 해체 시점에 으레 해보는 뻔한 다짐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짧지 않은 한국 아이돌사에서 원더걸스만큼 수많은 도전과 좌절을 경험하고도 살아남는 데 성공한 걸그룹은 없었고, 그들만큼 극적인 성장을 한 걸그룹도 없었다. 탄탄하게 완성된 원을 그려 품 안에 넣고 저마다의 길의 출발점에 선 이들에게, 색이 흐려질 것을 걱정하는 일처럼 쓸데없는 걱정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부당하게 ‘실패’로 기록되곤 했던 지난 10년의 ‘도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한다. 원더걸스는, 그 정도의 경의 어린 작별인사를 받아 마땅한 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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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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