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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24 20:25 수정 : 2017.02.24 23:47

윤균상은 성장 과정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매번 “재미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성적이고 평범한 아이였다” 정도로 갈무리를 하고,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는 “이어폰 끼고 걷기”, 좋아하는 음식은 “고기”라고 답하는 평범한 청춘이다. 뽀빠이엔터테인먼트 누리집 갈무리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배우 윤균상

윤균상은 성장 과정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매번 “재미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성적이고 평범한 아이였다” 정도로 갈무리를 하고,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는 “이어폰 끼고 걷기”, 좋아하는 음식은 “고기”라고 답하는 평범한 청춘이다. 뽀빠이엔터테인먼트 누리집 갈무리

사극을 보다가 겪게 되는 흔한 경험 중 하나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그리는 초반 2~4회 분량이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나머지 부분을 압도해 버리는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연기를 펼치는 아역 연기자의 리드를 따라 손에 땀을 쥐며 주인공들의 성장담을 지켜봤는데 기껏 성인 연기자가 바통을 넘겨받는 순간 극의 긴장감이 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경험, 혹은 주인공의 부모 세대를 연기하는 중견배우들의 무게감에 압도되었는데 정작 주인공이 그 무게감을 이어받지 못하고 발을 헛디뎌 버리는 경험들 한번씩 있지 않나.

문화방송 새 월화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둑>(이하 <역적>)의 방영 초반 시청자들의 불안도 그와 같았다. 연산군 시절 노비의 자식으로 새 세상을 그리려 했던 혁명가 홍길동을 그리겠다는 제작진은, 1화 앞부분에 잠깐 연산군(김지석)과 홍길동(윤균상)이 맞부딪히는 장면을 삽입하고는 곧바로 길동의 어린 시절로 가버렸다. 자식들만큼은 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에 면천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길동의 아버지 아모개를 연기한 배우는 하필 무게감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상중이었고, 앞부분에 잠시 스쳐 지나간 윤균상과 김지석의 존재감은 금세 잊혔다. 흥미진진하게 1화를 보고 난 뒤 자연스레 걱정이 엄습했다. 과연, 첫 주연작을 맡은 윤균상은 김상중의 존재감을 이겨낼 만큼 잘할 수 있을까?

길동과 무휼의 공통점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적>의 설정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아닌 실제 역사 속 도적 홍길동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이야기하는 제작진의 말과는 달리, 역사에 기록된 홍길동 또한 노비의 자식이 아닌 경성 절제사 홍상직의 얼자였으며, 의적이 아니라 백성들을 치가 떨리게 수탈한 악질적인 도적이었다. <역적>의 설정은 다르다. 높은 양반들의 폭정을 뒤집어엎을 영웅호걸로 자라날 거란 운명을 타고 태어난 탓에 죽임을 당한다는 지리산 일대의 아기장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역적> 속 홍길동은 천하디천한 노비의 자식이다. 어려서 괴력을 보이는 길동이 혹 아기장수로 지목되어 죽임을 당할까 걱정한 아비 아모개는 길동에게 힘을 억누르고 살 것을 요구한다. 양인 신분이 되면 길동 또한 아기장수라는 이야기를 듣는 일 없이 떳떳하게 무과에도 급제하고 장군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아모개는 면천을 위해 돈을 모으나, 길동을 위해 모으던 그 돈 때문에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온다. 모든 게 자신 탓이라 생각한 길동은 오랫동안 힘을 억누르며 사느라 힘을 쓰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순박한 청년으로 성장하지만, 그에게 다시 닥쳐온 비극이 그를 상놈도 인간 대접 받으며 사는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굳이 따지자면 <역적> 또한 허균의 <홍길동전>이 그랬듯 “폭군을 농락한 거물급 도적”이라는 모티브만 따온 순수 창작물인 셈이다.

그러니 이 홍길동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 홍길동이 아니다. 호부호형을 허해 달라고 우는 장면도 없고, 공맹의 도학을 배워 출장입상할 야망 같은 건 애초에 없던 소년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행동 때문에 어머니 금옥(신은정)을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의 초읽기에 들어갔던 악몽을 죄책감으로 안고 자란 아이, 자기 같은 천것들은 그저 모나지 않게 숙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익화리의 큰손이 된 아버지 아모개의 행보가 못내 걱정스럽고, 방물장수가 되어 삼천리를 돌아다니면서 짬짬이 아버지와 형과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조용히 은거해 살 만한 땅을 알아보고 다니는 소심한 소년이 바로 <역적>의 길동이다. 해서 길동을 연기하는 배우는 눈에 총기가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어딘가 어눌하고 주눅 든 어깨로 잔뜩 움츠린 발걸음을 연기할 수 있어야 하고, 원대한 야망이 꺾였다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지극히 소박한 행복이 꺾여야 비로소 분노하고 각성하는 보통사람을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 돌이켜보니, 윤균상은 이미 이와 비슷한 인물을 한 차례 연기한 적이 있다. 오로지 여덟 명의 동생과 할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사가 되려고 했던 까막눈 더벅머리 소년, 에스비에스 <육룡이 나르샤>(2015~2016)의 무휼 말이다.

마음 여린 소년이 ‘각성’한 뒤
세상 뒤엎는 영웅으로 성장하는
MBC 드라마 ‘역적’ 홍길동 역
초반 김상중의 존재감 이겨내

‘육룡이…’ 무사 무휼에서 보듯
선량한 얼굴·‘보통의 매력’으로
시청자의 감정과 소통하는
내성적이고 평범한 ‘순수청년’

이성계와 정도전과 이방원이 날고 기며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내용의 이 드라마에서, 윤균상이 맡은 무휼은 가장 평범한 백성이었다. 분이(신세경)처럼 백성으로서의 제 위치를 자각해 이웃들을 돕고 새 세상을 세우려는 원대한 야심도 없고, 이방지(변요한)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와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 무장한 사람도 아니다. 무휼에게 가장 시급한 건 어서 무예를 익혀 출세한 다음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을 가난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고, 해서 그는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소명을 각성하고 큰 뜻을 세운 이후에도 순박하게 헤헤 웃으며 자신을 등용해준 주군인 이방원(유아인)의 뒤를 따르는 인물이었다. 방원의 뒤를 따르다 보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네 사람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이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자 낙향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야심 없는 남자인 무휼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제 앞길에 피와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걸 깨달은 이후에야 비로소 각성한다.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는 이가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게 좋다는 지극히 소박한 이유 하나로 버텨왔던 철없는 소년은, 그 행복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지점이 되어서야 ‘조선제일검’이 됐다.

<육룡이 나르샤>의 무휼이나 <역적>의 길동 모두 결코 먼저 남에게 무력을 행사하거나 제 원대한 꿈을 펼쳐 보이는 종류의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복잡한 세상사 같은 거 모른 채 그저 기름진 땅 한 뙈기에 논이나 일구고 돼지나 몇 마리 치면서 소박하게 살았을, 그러나 세상이 그러지 못하게 등을 떠민 탓에 마지못해 각성하는 보통사람이다. 이런 순박한 청춘들을 윤균상이 연달아 연기하게 된 건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인터뷰 자리에서 성장 과정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매번 “재미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성적이고 평범한 아이였다” 정도로 갈무리를 하고,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는 “이어폰 끼고 걷기”, 좋아하는 음식은 “고기”라고 답하는 평범한 청춘이니까. 스물 넘어 연극을 하고 싶어 허락을 받으려 했을 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군대도 아직 안 다녀왔으면서”라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덜컥 군 입대를 해버린 것 정도가 30여년 평생의 가장 큰 일탈이라고 꼽는 윤균상은, 189㎝라는 훤칠한 키가 얼핏 한눈에 잘 안 느껴질 정도로 순박하고 긍정적인 얼굴을 한 보통의 청년이다. ‘보통’이란 말은 자칫 자기 색깔이 강렬한 또래 배우들 사이에서 제 매력을 뽐내 도드라지기 어려운 단점이란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윤균상의 ‘보통’은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이가 표현하는 감정은 나의 고충과 닮았구나’ 하며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만드는 ‘보편’에 가깝다.

첫 주연작, <역적>

첫 문단에서 던진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시간이다. 선량한 보편의 얼굴을 지닌 윤균상 덕분에, <역적>의 시청자들은 5회부터 펼쳐진 성인 길동의 연기를 안도하며 볼 수 있었다.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 행여 다칠까 두려워 울고, 어설픈 곡조나마 건드렁 뽑아내 동행의 마음을 위로할 줄 알며, 상처입은 이에게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선량하고 마음 여린 방물장수 소년. 이 모난 곳 없는 소년이 주먹을 쥐고 일어나 우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된 것이니 뒤집어엎어야 한다 말할 때, 우린 그게 권력을 탐하는 사심이나 젊은 혈기에 아무렇게 내뱉는 싸구려 호승심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저 순둥이가 저러랴. <역적>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리고 나아가 길동이 그렇듯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꿈을 전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장 보통의 청춘의 얼굴을 한 배우, 윤균상 덕분이다.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연재 4년차인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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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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