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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08 11:13 수정 : 2017.04.08 12:07

진행을 맡은 박미선은 촬영 현장에서는 기존의 사회통념이 여성에게 강요해 왔던 굴레에 대해 명확하게 짚어 이야기하며 패널들의 토론을 독려한다. 논쟁이 지나치게 과열됐다 싶은 순간 슬그머니 치고 들어와 상황을 정리하고 토론을 다시 본궤도 위로 올리는 솜씨도 흠잡을 곳이 없다. 교육방송 <까칠남녀> 화면 갈무리

[%%IMAGE1%%]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까칠남녀> 진행자 박미선

“따님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렇게 무책임한 남자를 만나도 오케이 하실 거예요?”

2021년 출시 예정인 남성용 경구피임약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나는 안 먹을 것”이라고 말하던 정영진을 향해 서유리가 질문을 던진다. “안 만나는 게 최고 좋지만, 만약에 만난다면 만일에 대비해서 본인의 몸은 본인이 지켜야죠.” 중간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메인 진행자가 조용히 말을 얹는다. “그런데 확률적으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딸은 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납니다.” 정영진의 말문이 갑자기 턱 막힌다. 서유리나 은하선과 격론을 벌일 때에도 얼굴에 미동 하나 없던 그가 순간 표정이 굳어지더니 말을 어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네 딸도 너 같은 남자 만나면 넌 어쩔래?”라는 질문을 이토록 평온한 투로 던질 수 있는 진행자. 교육방송(EBS)이 새로 선보인 젠더토크쇼 <까칠남녀> 2화를 보던 이들이 손꼽아 베스트로 뽑은 이 장면을 만든 진행자는 바로 박미선이다.

2회 만에 화제가 된 ‘까칠남녀’

한국사회에서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만 같던 젠더에 대한 편견과 통념을 한번 제대로 이야기해보자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까칠남녀>는 프로그램 안팎으로 매회 뜨거울 수밖에 없다. 방송인 서유리나 <이기적 섹스>의 저자 은하선, 단국대 서민 교수와 같은 여성주의자 패널들이 주도하는 대화는 늘 망설임이 없고, 기존 한국사회 남성들의 시선을 대변하는 패널 정영진과 봉만대 감독 또한 물러섬 없이 부딪친다. 덕분에 이제 고작 2회 전파를 탔을 뿐인 <까칠남녀>는 이미 찬반양론이 격돌하는 화제의 프로그램 반열에 올랐다. 교육방송 프로그램이 이처럼 화제의 중심에 놓인 게 <생방송 보니 하니> 이후 얼마 만인지. 매주 월요일 깊은 밤 <까칠남녀>가 방영된 직후 소셜네트워크에 접속해보면,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여성편향적이라며 화를 내는 이들부터, 정영진과 봉만대가 보기 불편하다며 말 통하는 사람들만 출연시키라고 외치는 이들까지 극과 극의 반응을 만날 수 있다.

1988년 MBC 코미디언으로 데뷔
몸개그 대신 ‘말’로 살아남아
MC에 라디오·시트콤까지 섭렵
여성 예능인 ‘최후의 생존자’

젠더토크쇼 ‘까칠남녀’ 맡아
평온한 말투에 담긴 날카로움에
민감한 대립 중재자 역할도 톡톡
여성 지위 바로잡는 쇼의 적임자

이 뜨거운 대립 속에서 중심을 잡고 전체 분위기를 부드럽게 아우르며 교통정리를 하는 것은 박미선의 몫이다. 제작발표회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제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패널분들과 전문가분들의 얘기를 들으며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던 박미선은, 촬영 현장에서는 기존의 사회통념이 여성에게 강요해 왔던 굴레에 대해 명확하게 짚어 이야기하며 패널들의 토론을 독려한다. 논쟁이 지나치게 과열됐다 싶은 순간 슬그머니 치고 들어와 상황을 정리하고 토론을 다시 본궤도 위로 올리는 솜씨도 흠잡을 곳이 없다. 박미선은 자기 목소리가 강한 패널들의 격론을 잠재우며 ‘모두를 위해 어떤 피임법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가를 이야기하자는 것이고, 이야기해보니 콘돔이 가장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논의의 맥을 짚어 요약해낸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웃기는 걸 잘 못하기 때문에, 하는 프로그램마다 교통정리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한 바 있지만, 한국에서 박미선만큼 복잡한 논의의 맥락을 능숙하고 품위 있게 정리할 수 있는 진행자는 많지 않다. 그는 이미 문화방송(MBC) <명랑히어로>에서 시사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성 패널들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지키는 역할을 한 바 있고, 문화방송 <세바퀴>에서는 입담으로 무장한 중년의 여성 패널들 사이에서 말의 길을 터주는, 웬만한 내공의 진행자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을 해냈다. 같은 방송사의 가상 결혼 버라이어티 <우리 결혼했어요>에선 출연자들이 미처 다 몰두하지 못한 로맨스의 빈틈을 끊임없는 추임새로 이어 붙여낸다. 데뷔 이후 30년간 쉬지 않고 늘 우리 곁에 있었던 그 친숙함 때문에 종종 간과되곤 하지만, 박미선은 유재석이나 손석희 제이티비시(JTBC) 보도부문 사장 정도를 제하면 비견할 만한 다른 진행자를 떠올리는 게 불가능한 진행자다.

1988년 데뷔할 때부터 이미 박미선은 동시대 다른 여성 코미디언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다른 코미디언들이 분장이나 슬랩스틱, 유행어 등으로 사람들을 웃겼다면, 박미선은 말과 말이 충돌하며 생기는 리듬감과 온도의 차이를 활용해 사람들을 웃겼다. <한겨레> 자료사진

돌이켜보면 1988년 문화방송 <개그 콘테스트>를 통해 데뷔할 때부터 이미 박미선은 동시대 다른 여성 코미디언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다른 코미디언들이 분장이나 슬랩스틱, 유행어 등으로 사람들을 웃겼다면, 박미선은 말과 말이 충돌하며 생기는 리듬감과 온도의 차이를 활용해 사람들을 웃겼다. 1988년 문화방송 <일요일 밤의 대행진>을 통해 선보인 출세작 ‘별난 여자’는 지금 봐도 촌스럽다는 느낌 없이 준수한데, 춤을 추는 박남정을 보고 “어머, 날렵해”라고 감탄해 놓고는 바로 뒤이어 특유의 심드렁한 말투로 “제비 같아”라고 첨언하는 것으로 보는 이의 허를 찌르는 광경은 3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위력적이다. ‘별난 여자’ 코너를 함께 하던 1년 선배 정재윤과 함께, 박미선은 여성 코미디언의 세대교체를 이끌었다. 송은이와 정선희를 위시로 해서 강유미와 안영미까지 이어지는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들 계보의 제일 위에, 박미선이 있었다.

1991년 에스비에스(SBS) 개국과 함께 문화방송에서 에스비에스로 이적해 간 박미선은 다음해 허참과 함께 <빙글빙글 퀴즈>를 진행하며 본인이 꿈꾸던 진행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됐다. 콩트 시절에도 말재주 하나로 관객들을 쥐락펴락했던 박미선은 진행자의 롤 또한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 방송국 간에 코미디언들이 이적하는 것이 배신 행위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지만, 이적을 이유로 기용을 꺼리기엔 박미선은 너무 유능했다. 그는 에스비에스로 이적한 지 오래지 않아 고향인 문화방송에서도 다시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박미선은 스튜디오 버라이어티(문화방송 <기인열전>, <사랑의 스튜디오>), 정통 코미디(한국방송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개그콘서트>), 라디오(문화방송 <김흥국 박미선의 특급작전>), 시트콤(에스비에스 <순풍 산부인과>)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성 예능인으로 군림했다.

한국 연예계가 여성 연예인에게 상대적으로 더 가혹하다는 건 큰 비밀도 아니지만, 중년의 여성 연예인에겐 그나마 있던 기회도 점점 줄어든다. 최정상급 연예인인 박미선에게도 그건 예외가 아니었다. 동년배 여성 예능인 동료들이 하나둘씩 방송 일선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던 2000년대 후반, 박미선 또한 살아남기 위해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어떻게든 제 공간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그는 2004년 에스비에스 <세상에 이런 일이>를 통해 메인 진행자에서 패널로 자리를 옮기는 충격을 처음 겪었고, 2008년 한국방송 <해피투게더3>에 합류할 때엔 고정 멤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일단 한 달 기용해보고 결정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2015년 신봉선과 함께 <해피투게더3>에서 방출에 가까운 석연치 않은 진행자 교체를 당했을 때, 박미선은 “쓸데없는 분란 없이 조용히 마무리됐으면 좋겠다”고 상황을 마무리했다. 박미선은 어느덧 그 세대 여자 예능인 중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

이런 적임자가 또 있을까

그렇기에 박미선이 <까칠남녀>의 메인 진행자란 사실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그는 허수경, 정은아, 이금희 등과 함께 보조 진행자에 머무르던 여성 진행자의 지위를 능력 하나만으로 메인으로 끌어올린 첫 세대의 일원이고, 나이 든 여성 연예인에게 야박한 한국 방송계에서 지금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한 제 세대의 유일한 생존자다. 무엇보다, 그는 남자 연예인들에게 입에 발린 뻔한 칭찬 대신 솔직한 속내를 이야기하는 ‘별난 여자’ 아니었던가. 여자에게만 유독 더 가혹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논의를 시작하자는 쇼를 진행하기에 이만한 적임자가 또 있으랴. 다음주에도 이 ‘별난 여자’는 민감한 이슈를 논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무거운 주제를 버겁게 여기지 않도록 분위기를 띄우며, 격론이 지나간 자리는 “우린 서로의 이야기를 더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는 대원칙으로 쓰다듬을 것이다. 마치 그 만듦새가 완벽해 바느질 자국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천계의 옷, 천의무봉의 경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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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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