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이 지난 몇년간 남긴 필모그래피를 보면, 단순히 코믹한 인물이란 말 한마디로 축약이 불가능한 복합적인 캐릭터들이 제법 비중 있게 자리를 차지한다. 영화 ‘위대한 소원’ 중. 뉴(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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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배우 안재홍
안재홍이 지난 몇년간 남긴 필모그래피를 보면, 단순히 코믹한 인물이란 말 한마디로 축약이 불가능한 복합적인 캐릭터들이 제법 비중 있게 자리를 차지한다. 영화 ‘위대한 소원’ 중. 뉴(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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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서도 관객은 웃어
정작 본인은 “그런 걱정 안 해”
인물에 맞는 다른 연기로 세분화 순박한 외모·현실적인 연기로
멜로 주인공 필모그래피도 쌓아
KBS 드라마 ‘쌈, 마이웨이’ 주연
코믹 이미지 대신 ‘달달함’ 가득 대중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4년 남짓 된 배우에게 ‘이미지 소모’라는 표현을 쓰는 건 어색한 일이지만, 여기에 ‘안재홍’이라는 이름을 적어 넣으면 어쩐 일인지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제 막 거대자본 영화에서 첫 공동주연을 맡은 영화(<임금님의 사건수첩>)를 남기고 첫 지상파 드라마 공동주연작(한국방송 <쌈, 마이웨이>)을 시작한 배우에게 이게 무슨 결례인가 싶을 테다. 그러나 안재홍의 코믹 연기는 그 자리가 주연이든 조연이든 비중과 무관하게 보는 이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다른 이들이 비웃거나 말거나 재미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족구에 몰두하는 영화 <족구왕>(2014) 속 불굴의 복학생 만섭이나, 티브이엔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에서 종이 연꽃을 든 채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으로 절 마당을 내려다보던 정봉이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안재홍에겐 굳이 웃기려 들지 않아도 어정쩡하게 서 있는 품새 하나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자연스레 무장해제시키는 친근함이 있고, 오버액션이나 슬랩스틱 대신 엇박자의 템포로 웃음을 이끌어내는 특유의 유머 코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가만히 서 있는 것만 봐도 웃음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그가 등장하면 웃기 시작한다 새로운 얼굴임에도 낯설지 않아 친근하고, 보기만 해도 일단 웃을 준비를 하게 만드는 배우.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에겐 이보다 더 좋은 이미지를 얻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더 다양한 작품에 왕성하게 출연하려는 배우에게 그게 꼭 좋기만 한 일일까?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은 편이었던 영화 <조작된 도시>(2017)의 캐릭터 데몰리션은 주인공 권유(지창욱)와 여울(심은경)이 이끌어가는 스토리라인 속에서 든든한 조력자로 활약하는데도, 사람들은 그가 진지한 상황에 처해 있는 순간조차 그를 보며 웃었다. 비슷한 일은 그의 스승인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에서도 일어났다. 해변에 누워 있는 영희(김민희)를 깨우러 온 조감독 승희에게 딱히 우스울 구석이나 재미난 설정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묵직하게 흘러가던 이 괴물 같은 영화 한가운데에 안재홍이 연기한 승희의 목소리가 들어오자 하나둘 웃기 시작했다. 영화 촬영지를 헌팅하러 내려왔다는 승희가 영희를 다른 스태프에게 인사시키는 장면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승희가 이 영화에서 딱히 웃기는 존재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안재홍이 홍상수의 전작 <북촌방향>(2011)이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에 출연했을 때는 생기지 않았던 일들이, <족구왕>과 <응답하라 1988> 이후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안재홍은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코미디를 사랑하는지 누누이 밝혀왔다. 그만큼 장르에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는 배우가 그 장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불행한 일이리라. 게다가 그는 똑같은 연기를 반복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 촌스럽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향해 숨김 없이 우직하게 걸어가던 <족구왕>의 만섭의 뚝심과, 총각 딱지를 떼고 죽고 싶다는 시한부 친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위대한 소원>(2016) 속 갑덕의 눈치 없음, 소심하고 나약한 것 같지만 예종(이선균)과 함께 사건을 캐러 다니며 조금씩 성장하는 <임금님의 사건수첩>(2017)의 사관 이서의 비범함은 같은 코미디 장르 안에서도 다른 페이지에 속한다. 말하자면 그는 각 인물에게 필요한 결을 예민하게 골라 세분화하는 재능의 소유자다. 그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제 막 시작하는 배우가 그런 걱정을 할 단계는 아니”라거나, “아직까지는 많이 소모됐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답습의 개념이 아니라, 원하시는 걸 충족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느긋하게 이야기한 것에는 그 재능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가 지난 몇년간 남긴 필모그래피를 보면, 단순히 코믹한 인물이란 말 한마디로 축약이 불가능한 복합적인 캐릭터들이 제법 비중 있게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안재홍이 지닌 특유의 순박한 외모와 현실적인 연기 톤은 멜로에도 그럴싸하게 들어맞는다. 친구 상원(심희섭)과 함께 핑클의 ‘영원한 사랑’을 소리 높여 부르던 <1999, 면회>(2013)의 승준의 의뭉스러운 소심함은, 그가 외박을 나온 친구 민욱(김창환) 몰래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민욱의 여자친구인 에스더(이남옥)가 남긴 음성메시지를 들으며 숨죽여 우는 장면에서 흥미로운 방향 전환을 한다. 어쩌면 에스더가 전해 달라던 이별편지를 전하지 못한 채 계속 시간만 끌던 승준이 바로 에스더가 민욱을 차버리는 이유가 아닐까? 영화는 끝날 때까지 이렇다 할 확답을 주지 않지만, 영화 내내 세 친구 중 가장 순박하고 선량한 표정으로 웃던 승준의 갑작스러운 울음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속 재홍은 어떤가? 그는 자신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자신과 해원(정은채)이 한때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술자리 이야깃거리로 올라오는 것을 봐야 했고, 알고 보니 해원이 자신을 떠난 이유가 방금까지 같이 이야기하던 학교 선생 성준(이선균)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황망하고 서러운 마음의 여정을, 안재홍은 방황하는 눈빛과 채 다물지 못한 입만으로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10년 전 했던 약속을 들이대며 절친 우희(천우희)에게 연애를 제안하는 웹드라마 <출중한 여자> 속 재홍은 또 다르다. 적당히 웃어넘기려 “지금 장난하는 거지?”라고 묻는 우희에게 상체를 스윽 기울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장난 같습니까?”라고 되묻는 재홍은, 우희의 속마음 그대로 “이럴 땐 남자네” 싶은 순간을 남긴다. 심지어 안재홍은 2015년 매거진 <더블유 코리아> 창간 10주년을 맞아 제작되고 한정상영된 옴니버스 영화 <여자, 남자>의 수록작인 <슬픈 씬>에서는 이나영과 함께 헤어진 직후에도 직장에서 옛 연인과 마주쳐야 하는 기구한 팔자의 영화 동시녹음 기사를 연기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음앓이를 하는 쪽이 안재홍이 아니라 이나영이다! 극중 영화 촬영장에서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 배우는, 너무도 차갑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붐마이크를 쭉쭉 뽑으며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옛 남자친구를 보느라 정작 연기해야 하는 슬픔을 표현하는 데 애를 먹는다. 얼핏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조합 같지만, 화면 위에서 안재홍은 어색한 태연함과 긴장감을 연기하며 이 조합을 설득해낸다. 안재홍이 조바심을 내지 않은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코믹 이미지로만 영영 굳어버리는 건 아닐까를 걱정하기에는, 그에겐 아직 소맷자락 속에 숨겨둔 채 다 꺼내지 않은 매력들이 너무 많다.
한국방송 드라마 <쌈, 마이웨이> 속 김주만(안재홍)은 맛있는 음식을 찾아 제품으로 개발해 홈쇼핑 방송에 소개하는 대리다. ‘쌈, 마이웨이’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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