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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04 21:20 수정 : 2017.08.05 00:24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소녀시대 ‘다만세’ 10년

2007년 ’다시 만난 세계’로 데뷔한 직후의 소녀시대. <한겨레> 자료사진
노래에도 입장이라는 게 있다면 2016년은 ‘다시 만난 세계’(이하 ‘다만세’)에게 다소 독특한 한 해였을 것이다. 그해 봄, 한국여성민우회는 자신들이 준비한 페미니즘 입문 강연 프로그램의 제목으로 ‘다만세’를 차용했다. 수많은 젊은 여성이 ‘다만세’를 흥얼거리며 한국여성민우회의 강연을 듣는 동안, 같은 해 여름엔 학교 본부의 독단적인 미래라이프대학 졸속 신설에 반대하며 본부관 점거 투쟁에 나선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경찰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다만세’를 함께 불렀다. 모두 자신들에게 주어진 세계의 조건을 상수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고 싸움에 나선 이들이 내린 선택이었다.

‘새 시대 투쟁가요’ 되기까지

의미심장하게도 이 두 가지 일에는 모두 특별한 의도가 없었다. 강연 프로그램의 제목을 처음 제안한 문보미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다만세’를 차용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무의식적인 선택이었다고 답했다. 이대생들 또한 노래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학생의 말에 따르면, 진압이 있기 전날 학생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함께 즐길 수 있는 노래들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아마 누군가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에 저장된 플레이리스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200여명의 학생이 1600여명의 경찰과 대치하던 순간, 고조되는 공포 속에서 누군가 함께 노래를 부르자는 제안을 했다. 큰 목소리로 함께 노래를 부르면 두려움도 덜할 테니까. 그중 한 곡이 ‘다만세’였고, 경찰에 가로막혀 미처 무리로 복귀를 못 한 학생 한 명이 휴대폰을 꺼내 그 광경을 영상으로 남긴 것이 일의 전말이었다. 왕년의 운동권들이 호들갑스레 짐작했던 것과 달리 ‘다만세’를 선택한 이들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그 곡을 부르거나 제목을 빌리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많은 매체는 새로운 세대가 선택한 새로운 투쟁가요라는 식으로 ‘다만세’를 조망했지만 말이다.

<한겨레> 토요판 역시 이대생들의 투쟁 영상이 화제가 될 무렵 이 현상에 대한 글을 준비했던 매체 중 하나였는데, 독특하게도 외부 필자인 내게 칼럼을 청탁했다. 청탁을 받고 취재를 하던 나는 어느 지점쯤에서 기사를 포기했다. 그날 그곳에서 ‘다만세’가 불린 것은 우연이라고 해도 좋았던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 노래를 새로운 시대의 투쟁가요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기획 의도가 애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투쟁을 진행하고 있던 이대생들은 외부 언론이나 외부 단체의 개입이 혹시라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투쟁을 몰아가고 나아가 그 성격을 왜곡시키지는 않을까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 판단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직접 투쟁의 전면에 나선 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들에겐 나나 <한겨레>나 어쨌든 외부인이었을 테니까, 외부인이 그 곡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자칫 책임지지도 못할 주제에 싸움을 부추기는 꼴이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악물고 싸우기 바쁜데, 현장에 있어 보지도 않았던 외부인이 팔자 좋게 동영상만 보고 “그래! 당신들은 무의식중에 새 시대의 투쟁가요로 ‘다만세’를 채택한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건 얼마나 무책임한가.

민우회 페미니즘 입문강연 제목
이화여대 점거투쟁 때 떼창하고
박근혜 퇴진 때 함께 부른 노래
지난해부터 의미 확장한 ‘다만세’

소녀시대 멤버 써니와 유리도
“가수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2007년 8월 발표 이후 10년
연결될수록 열리는 새로운 세계

에디터는 내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이런 당부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사로 쓰지는 않더라도 이 투쟁을, 이 투쟁 속에서 학생들이 ‘다만세’를 선택한 이야기를 언젠가는 꼭 기록으로 남겨주세요. 내 생각에 이건 매우 중요한 순간인 것 같아요.” 결국 그의 말과 판단이 맞았다. 몇 개월 뒤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엎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젊은 좌파와 페미니스트와 퀴어들은 저마다 깃발을 만들어 들고 거리로 나섰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다만세’에 맞춰 떼창을 하고 춤을 추었다. 광화문부터 서면까지, 집회가 있고 젊은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이 지옥도 같은 세계를 함께 바꿔보자고 외치며 “포기할 수 없”기에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라고 다짐하는 이들이 있었다. 시작은 어땠는지 몰라도 결국 ‘다만세’는 새 시대의 투쟁가요가 됐다.

‘다만세’는 어쩌다 이런 지위를 얻게 된 걸까? 아마 노래 자체가 가진 잠재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사가 김정배는 여자 멤버들끼리 서로에게 함께 시련을 헤쳐 나가자고 말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가사를 썼다고 말한 바 있다. 애초부터 이성애적 연애 감정에 국한된 적이 없는 곡인 셈이다. 그래서 노래는 화자인 ‘내’가 느끼는 달콤함이나 사랑의 설렘을 이야기하는 대신,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않고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도저히 그 끝이 어디쯤인지 “알 수 없”어서 때로는 미래가 벽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변치 않는 사랑으로 지켜”주는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지니까 울지 않고 이 길을 함께 걷자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곡가 켄지 또한 개별 멤버들의 특성이 잘 드러나도록 파트마다 곡의 성격이 화려하게 변하는 전형적인 아이돌 팝의 문법이 아니라, 모두가 한목소리로 부를 수 있는 정통 팝의 예스러운 문법을 따랐다. 뮤직비디오조차 상대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대신 저마다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향해 도전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담아낸 ‘다만세’는, 출발부터 단 하나의 ‘너’와 단 하나의 ‘나’ 사이로만 수렴하는 대신 더 많은 너들과 나들이 손에 손을 잡으며 연결될 공간을 열어 둔 노래로 시작했다.

손에 손 잡게 한 노래

그렇게 열려진 공간에,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이들이 결합했다. 그래서 노래의 제목이 ‘Into the New World’(영문 제목. 인투 더 뉴 월드), 새로운 세상에 관한 노래인 동시에 ‘다시 만난 세계’인 것이다. 너를 알기 전 나는 이 세계 속에 종속된 존재, 만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언제나 이 크고 차갑고 침묵투성이인 세계 안에 갇혀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너로 인해 나는 이 세계의 총체에 내 나름의 의미를 붙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났고, 그렇기에 더 이상 세계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로 대등한 자리에서 세계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던 세계를 너로 인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 광경일 것이나 동시에 전혀 새로운 광경, ‘New World’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그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Into the New World.’

소녀시대에게 ‘다만세’가 경험한 10년의 변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진심으로 노래를 전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데뷔곡을 녹음했던 멤버들은, 자신들의 노래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보며 내심 뿌듯해했다. 써니는 투쟁을 경험했던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에 “이제 대학생이라면 다들 동생들이라 더 마음이 아프다”며 사태를 예의 주시했고, 유리는 월간지 <더블유>와의 인터뷰에서 “(이화여대) 영상을 몇 번이나 봤고, 가슴이 벅차서 울기도 했다. 가수로서 큰 자부심을 느낀 순간이었다. 내가 이 일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고 음악이나 퍼포먼스로 전달했던 영감이 실현된 거니까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본인들은 몰랐겠지만, ‘다만세’를 부르며 싸움에 나선 그 모든 이들 곁에는 소녀시대 멤버들의 시선이 함께하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기 전 ‘다만세’에는 독특한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회사에 소속된 여자 가수라면 다들 한번씩 불러봤던 곡.” 애초에 노래를 부르기로 했던 그룹이 예기치 않은 해체를 겪은 탓에, 노래가 주인을 잃고 허공에 붕 뜬 채 5년간 임자를 찾아 소속사 안을 떠돌았던 탓이다. 그리고 노래가 발표된 지 10년이 되는 2017년 8월5일, 이제 ‘다만세’에 새로운 꼬리표를 달아줘도 좋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라면 다들 한번씩 불러봤던 곡”이라고.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취재에 도움을 주신 소녀시대 써니씨, 한국여성민우회 문보미 활동가, 익명을 요구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A씨, <한겨레> 토요판 최우성 에디터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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