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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7 18:04 수정 : 2016.08.17 19:28

박용현
정치 에디터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손자와 며느리 안부를 묻고, 수술한 곳이 잘 회복되고 있다는 말씀에 이어 과거의 어디쯤을 더듬는 듬성듬성한 대화의 도중이었다.

“너 대학교 가고 나니 심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엄마가 병원에 청소일 하러 좀 다녔거든.”

까맣게 모르고 있던 어머니의 세월 한자락을 30년이 지나서야 불쑥 알게 된다는 건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엄마, 죄송해요. 난 여태 그런 것도 모르고 살았네.’ 서울에 와서 부족함 없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의 그 노고도 서려 있었다는 생각에, 어떤 아림 같은 게 가슴을 질러갔다. 청소노동자가 사회적 관심을 받을 때마다 그분들을 내 어머니‘처럼’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게 이젠 움직일 수 없는 당위가 된 셈이다.

그러던 차에, 지난 주말 김포공항의 한 청소노동자가 삭발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30년 전 내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어머니였다. 자식을 위해 숭고한 노동을 해온 그분과 동료들은 “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고 했다. 하루 11시간을 일하면서 손목·허리 안 아픈 사람이 없는데 시급은 정부 지침에도 훨씬 못 미치는 6030원. 쉴 곳은 화장실 물품창고뿐. 동료와 잠깐 이야기 나누는 것조차 금지되는 통제. 해고 위협과 폭언. 그도 모자라 관리자들이 차마 말 못할 성추행까지 저질렀다는 대목에선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리고 이틀 뒤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저 삭발식이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인 ‘헬조선’ 따위를 쓰지 말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저게 지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저 어머니들과 그 자식들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있을까. “경제 발전”으로 김포공항에 인천공항까지 휘황한 세상이 됐지만 그곳이 누군가에겐 지옥과 같은 곳이라면 “함께 가는 공동체 의식”으로 무장한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더 참담하지 않은가. 어찌 보면, 삭발식에서 머리카락이 툭툭 떨어지던 그 시간에 써졌을 대통령의 연설문이 인간의 존엄이 땅에 떨어진 현실을 외면하고 이를 타개할 아무런 비전도 담지 않은 채 “대한민국의 성공신화”만 되뇐 것 자체가 ‘헬조선’의 본질일 수 있다. 존엄 없는 번영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병실 창문으로 부서지는 봄 햇살을 받으며 어머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매일 피비린내 맡으면서 일하려면 욕지기가 나고 말도 못했지. 의사 선생님들이랑 같이 밥 먹다 보면 선생님들이 ‘이분들 입맛 없을 테니 반찬 좀 상큼한 거로 준비하라’고 그랬다니까.”

어머니는 보람있던 한때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선의의 풍경이 선뜻 그려지지 않았지만, 엄마의 노동이 계단 아래 웅크리고 끼니를 때우는 그런 식은 아니었음에 그나마 안도했다. 퇴근 때면 병원 쪽이 택시비도 일일이 챙겨줬는데 어머니는 집에 걸어갈 수 있다며 한사코 뿌리쳤다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났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던 그 이야기를 곱씹자니, 어머니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 속에서 걸러낸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이 공항에서 일하는 누구나와 똑같이 존중받고, 한데 어울려 밥 먹고, 서로 담소하며 휴식하고, 노동의 결실을 공정하게 나누고, 훗날 아들의 손을 잡고 그 시절 이야기를 흐뭇한 표정으로 들려줄 수 있는.

그런 미래야말로,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으로 이뤄내자고 대통령이 제시해야 할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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