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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21 18:04 수정 : 2016.08.22 14:27

김영희

사회에디터

경력이 수십년 된 기자라면 역사적 현장이나 사회를 흔든 폭로, 유명인 인터뷰를 ‘인생의 기사’로 꼽을지 모르겠다. 특종 기자가 아니었던 탓인지 몰라도, 내게는 16년 전 만났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런 기사다. ‘사람이 베푸는 것도 어느 정도 여유로워야 가능하다’는 내 선입견을 뒤바꿔놨던 이들. 지난 한달간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의혹 관련 기사들을 매일같이 다루는데 자꾸 그들이 떠올랐다.

그는 한 입양단체의 가정위탁모를 하는 40대 중반의 주부였다. 주소를 들고 서울 만리동 고개 골목을 뒤져 찾아 그 집에 들어섰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천장이 낮은 반지하 20여평의 연립주택엔 아기의 천기저귀가 잔뜩 걸려 있었다. 자신의 품에서 몇달을 키우다가 해외입양을 떠나보낸 아기 19명의 육아일기를 7년째 적어온 것이 두툼한 노트로 몇권이었다. “막내형은 너한테 감기 옮길까봐 숨도 안 쉬고 들여다본단다. 너 보느라 밖에 나가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쌍둥이 형들은 공원에서 밤이면 벚꽃을 한가지씩 꺾어다 까만 화병에 꽂아 놓는단다.” 엄마를 닮았을까, 그의 세 아이도 19명의 동생들을 끔찍이 아꼈다.

또 하나는 막내 아이를 공개입양한 부부였다. 부평 어딘가의 전세 아파트로 기억하는데, 두 아들이 고등학생이 된 뒤 입양 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자원했다고 했다. 처음 맡은 아기는 심장 사이 막에 구멍이 있었다. 아들들은 기저귀를 빨고 집안 청소를 도맡으며 엄마를 도왔다. 구제금융 사태로 남편의 안정적 수입도 끊겼던 시기, 몇달간 정이 듬뿍 든 막내가 장애아라서 시설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는 소식에 부부는 밤새 끌어안고 울었다. 기사가 나간 뒤 그들의 아들이 “동생을 잘 키우겠다, 감사하다”며 보내준 메일은 내가 받은 가장 근사한 독자편지였다.

16년이 흘러, 이젠 ‘가난’이 루저나 실패자라고 규정할 뿐 아니라 비웃는 세상이 돼 버렸다. 진경준 전 검사장 인사검증 실패에 대한 책임만으로도 벌써 물러났어야 했던 민정수석이 한달 가까이 ‘버티기’를 하며 편법과 위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만의 세계’가 사는 법을 몸소 적나라하게 보여주니 말이다.

그의 가족이 자동차 살 돈이 없었겠는가. 페이퍼컴퍼니 같은 가족회사 하나 뚝딱 만들어 법인 소유 차를 쓰면 법인 비용으로 처리되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통신비도 역시 법인 비용 처리가 가능하다. 부동산실명제로 명의신탁이 금지된 게 벌써 20여년 전인데, 기흥컨트리클럽 안팎의 땅에서만 차명 의혹이 나오는 게 여러 필지다. 투자 일을 하는 한 친구는 “지금 같은 세제에선 부동산 수익이 수천만원 정도만 되어도 아마 누구나 법인 만들려 할 것”이라고 한탄했다. 그 세계에선 서로 밀어주기도 기본이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며칠 전 기자들에게 “조사해보니 운전요원은 90%가 전보제한 기간에 옮겨왔더라. 우 수석 아들도 일반적인 경우다”라고 말했다. 의경인 우 수석 아들의 보직특혜 의혹에 처음엔 ‘알음알음 추천’을 받았다고 해명하더니, 이젠 아예 지난해 대대적으로 개선한 의경 관련 내규를 어기는 게 일상이라고 자백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 세계의 ‘민낯’이다.

16년 전 만났던 그들과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힘으로 벌어가며 넉넉지 않아도 타인에게 베풀려는 사람들이 아직 이 사회에 적지 않다고 난 믿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이 그런 사람들을 절망의 바닥에 밀어넣는 일만큼은 멈춰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야말로 우 수석이 지금 자리에서 물러나 제대로 수사를 받아야 하는 진짜 이유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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