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에디터 씁쓸하다 못해 피식 웃음마저 나는 중학생 때의 기억. 아주 완고한 선생님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아무 말도 하면 안 됐다. 심지어 질문도 하면 안 됐다. 학기 초에 한두 명이 멋모르고 질문을 했다가 이유도 모른 채 체벌을 당하고 나면 그 뒤로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비상식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을 겪으며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는 법을 제대로 교육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을 보며 저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민주주의는 대화를 통한 통치”라는 상식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합의, 사드 배치 결정, 북한 핵실험…. 중대한 사안·국면마다 국민과 당사자 앞에 나서서 설명하고 경청하고 교감하는 모습은 없었다. 국민은 갑작스런 발표를 듣거나 “대통령은…말씀하셨다”는 일방적인 전언만 들었다. 경주 지진 현장과 불안이 감도는 원전도 일주일 뒤에야 찾아갔다. 테러·지진 같은 위기상황 때 바로 취재진 앞에 나타나 국민에게 말을 거는 외국 정상의 모습은 먼 나라 이야기다. 특히 외교안보 사안에서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면 어김없이 “불순세력” “유언비어” 같은 매질이 날아든다. 그 바탕에 깔린 인식을 보여준 게 얼마 전 여야 3당 대표와의 회동이었다. 박 대통령은 여야정 안보협의체를 구성하자는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제안에 “안보는 근본적으로 대통령 중심으로 결정되는 사항이고 모든 나라가 이 문제는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야당의 제안과 의견은 모두 단호하게 배격했다. 115분간의 회동을 야당은 “안보 강의”였다고 평했다. 물론 대통령제 국가에서 외교안보에 대한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한다. 하지만 그런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 곧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외교안보 분야에서 통제받지 않는 대통령의 권한은 대통령제의 대표적인 폐해로 지적된다. 백악관에서 일하기도 했던 윌리엄 마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로스쿨 교수는 대통령제에서 외교안보 권한이 특히 비대해져 이를 멋대로 휘두르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부시 대통령이 의회선거에서 드러난 반대 여론과 심지어 여당 내의 반대까지 무시한 채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라크전을 밀어붙인 사례,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 스캔들’ 와중에 테러 응징 명분으로 아프간을 폭격했다가 추문 덮기용이라는 비판을 받은 사례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따라서 외교안보 정책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의 평가가 반영되게 하고, 의회의 기능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견제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헌법의 정신을 강조한다. “왕의 지배를 타파하고 건국된 미국의 헌법은 국가안보와 외교정책이란 이름 아래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일개 개인의 손에 쥐여주지 않았다.”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한 우리 헌법의 뜻도 다르지 않다. 공공의 사안을 다룰 때 모두가 참여할 권리야말로 민주주의의 토대다. 전체 국민의 운명과 직결되고 정권이 끝나도 그 영향이 계속될 외교안보 정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통령이 선택한 방향에 의문을 가지는 이들,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민주사회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들끓는 질문을 잠재우고 ‘국론통일’만 외칠 게 아니라, 직접 국민과 대화하고 설득해야 한다. 야당과도 긴밀히 만나 ‘강의’ 아닌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런 설득과 소통 능력을 지닌 인물이어야 외교안보의 최종 결정권자 자격이 있을 것이다. (의심스런 병역면제자의 고위 공직 배제 등 안보 의지를 보여줄 단호함도 물론 필요하다.) 나라 안팎의 정세가 갈수록 어지러우니 더욱 그런 대통령이 그립다. 그건 다음 대통령의 자질에 대한 바람이기도 하다. piao@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외교안보와 대통령의 독단 / 박용현 |
정치 에디터 씁쓸하다 못해 피식 웃음마저 나는 중학생 때의 기억. 아주 완고한 선생님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아무 말도 하면 안 됐다. 심지어 질문도 하면 안 됐다. 학기 초에 한두 명이 멋모르고 질문을 했다가 이유도 모른 채 체벌을 당하고 나면 그 뒤로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비상식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을 겪으며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는 법을 제대로 교육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을 보며 저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민주주의는 대화를 통한 통치”라는 상식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합의, 사드 배치 결정, 북한 핵실험…. 중대한 사안·국면마다 국민과 당사자 앞에 나서서 설명하고 경청하고 교감하는 모습은 없었다. 국민은 갑작스런 발표를 듣거나 “대통령은…말씀하셨다”는 일방적인 전언만 들었다. 경주 지진 현장과 불안이 감도는 원전도 일주일 뒤에야 찾아갔다. 테러·지진 같은 위기상황 때 바로 취재진 앞에 나타나 국민에게 말을 거는 외국 정상의 모습은 먼 나라 이야기다. 특히 외교안보 사안에서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면 어김없이 “불순세력” “유언비어” 같은 매질이 날아든다. 그 바탕에 깔린 인식을 보여준 게 얼마 전 여야 3당 대표와의 회동이었다. 박 대통령은 여야정 안보협의체를 구성하자는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제안에 “안보는 근본적으로 대통령 중심으로 결정되는 사항이고 모든 나라가 이 문제는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야당의 제안과 의견은 모두 단호하게 배격했다. 115분간의 회동을 야당은 “안보 강의”였다고 평했다. 물론 대통령제 국가에서 외교안보에 대한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한다. 하지만 그런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 곧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외교안보 분야에서 통제받지 않는 대통령의 권한은 대통령제의 대표적인 폐해로 지적된다. 백악관에서 일하기도 했던 윌리엄 마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로스쿨 교수는 대통령제에서 외교안보 권한이 특히 비대해져 이를 멋대로 휘두르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부시 대통령이 의회선거에서 드러난 반대 여론과 심지어 여당 내의 반대까지 무시한 채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라크전을 밀어붙인 사례,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 스캔들’ 와중에 테러 응징 명분으로 아프간을 폭격했다가 추문 덮기용이라는 비판을 받은 사례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따라서 외교안보 정책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의 평가가 반영되게 하고, 의회의 기능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견제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헌법의 정신을 강조한다. “왕의 지배를 타파하고 건국된 미국의 헌법은 국가안보와 외교정책이란 이름 아래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일개 개인의 손에 쥐여주지 않았다.”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한 우리 헌법의 뜻도 다르지 않다. 공공의 사안을 다룰 때 모두가 참여할 권리야말로 민주주의의 토대다. 전체 국민의 운명과 직결되고 정권이 끝나도 그 영향이 계속될 외교안보 정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통령이 선택한 방향에 의문을 가지는 이들,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민주사회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들끓는 질문을 잠재우고 ‘국론통일’만 외칠 게 아니라, 직접 국민과 대화하고 설득해야 한다. 야당과도 긴밀히 만나 ‘강의’ 아닌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런 설득과 소통 능력을 지닌 인물이어야 외교안보의 최종 결정권자 자격이 있을 것이다. (의심스런 병역면제자의 고위 공직 배제 등 안보 의지를 보여줄 단호함도 물론 필요하다.) 나라 안팎의 정세가 갈수록 어지러우니 더욱 그런 대통령이 그립다. 그건 다음 대통령의 자질에 대한 바람이기도 하다.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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