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저는 요즘 미르, 케이스포츠 재단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선임기자라는 직함에서 짐작하시겠지만 제 ‘연식’이 제법 됐습니다. 현장기자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20년 이상 차이 나는 후배들과 함께 취재 일선에 나선 건 <티브이(TV)조선>이 안겨준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한달 전쯤입니다. 우병우 민정수석을 소재로 칼럼을 하나 쓰려고 몇 군데 전화를 돌렸습니다. 사정당국의 한 관계자가 그러더군요. “괜히 헛다리 긁지 말아요. 우병우가 아니라 미르 재단이 본질입니다.”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미르 재단이 뭐죠?” “허허, 기자 맞아요?” 인터넷을 뒤져보니 조선이 이미 자세하게 보도를 했더군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여당 성향의 조선도 이토록 치열한데 난 뭐 하고 있었나, 선임기자랍시고 뒷짐 진 채 거들먹거리기나 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편집국장에게 취재팀을 꾸리자고 요청한 겁니다. 천하의 게으름뱅이인 제가 말이죠. 취재를 하면 할수록 조선의 보도가 훌륭하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취재 그물은 호수를 다 덮도록 넓게 쳤는데도 그물코는 피라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 없이 촘촘했습니다. 7월27일이 첫 보도인데 이미 4월부터 취재에 들어갔더군요. 재단의 어느 관계자는 저희 기자를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내며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조선 기자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달라붙었으면 그랬겠습니까. 다행히도 조선의 손때가 덜 탄 곳이 있었습니다. 케이스포츠입니다. 미르는 조선이 싸그리 훑고 지나가 이삭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는데 케이스포츠에는 그나마 저희 몫이 조금은 남아 있었습니다. 최순실입니다. 저희가 케이스포츠 현장에서 찾아낸 최순실의 발자국과 지문은 어쩌면 조선이 남겨놓은 ‘까치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작 뉴턴이 이런 말을 했다죠.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감히 뉴턴 행세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한겨레가 한발짝 더 내디딜 수 있었던 건 조선의 선행 보도가 거대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선이 침묵하기 시작했습니다. 송희영 주필 사건 이후 처신하기가 어려워졌겠죠. 게다가 내년 3월에는 종편 재허가를 받아야 하니 청와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건 조선이 취재해 놓고 내보내지 못한 내용입니다. 저희가 조선의 뒤를 좇다보니 ‘잃어버린 고리’가 두세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사건의 전체 모자이크를 끼워맞출 수 있는 ‘결정타’들이죠. 조선이 물증을 확보한 듯한데 보도는 실종됐습니다. 기사는 언제 햇빛을 보게 될까요. 나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힘 빠졌을 때라면 가치가 있을까요? 사장님은 기자들 수백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깥 사람들을 만나서 틈만 나면 기자들 자랑을 해대는 통에 “자식 자랑 하면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죠. 그렇게 아끼는 기자들의 땀방울이 어느 캐비닛에 처박힌 채 증발돼가고 있습니다. 기자 개개인보다는 조선의 이름값이 더 중요하겠죠. 사장님은 몇 년 전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에게 저녁을 사면서 이런 건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언론이 이념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념 위에 언론이 있다.” 폭탄주는 끊으셨기에 알잔은 맹물로 채웠지만 건배사 내용만큼은 100% 원액처럼 진했다고 하더군요. 사장님은 젊은 시절 방갑중이라는 이름의 성실한 외신부 기자였고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고도 들었습니다. 사장님이 당당할 때 권력도 감히 조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십시오. kyummy@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님께 / 김의겸 |
선임기자 저는 요즘 미르, 케이스포츠 재단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선임기자라는 직함에서 짐작하시겠지만 제 ‘연식’이 제법 됐습니다. 현장기자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20년 이상 차이 나는 후배들과 함께 취재 일선에 나선 건 <티브이(TV)조선>이 안겨준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한달 전쯤입니다. 우병우 민정수석을 소재로 칼럼을 하나 쓰려고 몇 군데 전화를 돌렸습니다. 사정당국의 한 관계자가 그러더군요. “괜히 헛다리 긁지 말아요. 우병우가 아니라 미르 재단이 본질입니다.”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미르 재단이 뭐죠?” “허허, 기자 맞아요?” 인터넷을 뒤져보니 조선이 이미 자세하게 보도를 했더군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여당 성향의 조선도 이토록 치열한데 난 뭐 하고 있었나, 선임기자랍시고 뒷짐 진 채 거들먹거리기나 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편집국장에게 취재팀을 꾸리자고 요청한 겁니다. 천하의 게으름뱅이인 제가 말이죠. 취재를 하면 할수록 조선의 보도가 훌륭하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취재 그물은 호수를 다 덮도록 넓게 쳤는데도 그물코는 피라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 없이 촘촘했습니다. 7월27일이 첫 보도인데 이미 4월부터 취재에 들어갔더군요. 재단의 어느 관계자는 저희 기자를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내며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조선 기자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달라붙었으면 그랬겠습니까. 다행히도 조선의 손때가 덜 탄 곳이 있었습니다. 케이스포츠입니다. 미르는 조선이 싸그리 훑고 지나가 이삭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는데 케이스포츠에는 그나마 저희 몫이 조금은 남아 있었습니다. 최순실입니다. 저희가 케이스포츠 현장에서 찾아낸 최순실의 발자국과 지문은 어쩌면 조선이 남겨놓은 ‘까치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작 뉴턴이 이런 말을 했다죠.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감히 뉴턴 행세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한겨레가 한발짝 더 내디딜 수 있었던 건 조선의 선행 보도가 거대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선이 침묵하기 시작했습니다. 송희영 주필 사건 이후 처신하기가 어려워졌겠죠. 게다가 내년 3월에는 종편 재허가를 받아야 하니 청와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건 조선이 취재해 놓고 내보내지 못한 내용입니다. 저희가 조선의 뒤를 좇다보니 ‘잃어버린 고리’가 두세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사건의 전체 모자이크를 끼워맞출 수 있는 ‘결정타’들이죠. 조선이 물증을 확보한 듯한데 보도는 실종됐습니다. 기사는 언제 햇빛을 보게 될까요. 나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힘 빠졌을 때라면 가치가 있을까요? 사장님은 기자들 수백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깥 사람들을 만나서 틈만 나면 기자들 자랑을 해대는 통에 “자식 자랑 하면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죠. 그렇게 아끼는 기자들의 땀방울이 어느 캐비닛에 처박힌 채 증발돼가고 있습니다. 기자 개개인보다는 조선의 이름값이 더 중요하겠죠. 사장님은 몇 년 전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에게 저녁을 사면서 이런 건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언론이 이념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념 위에 언론이 있다.” 폭탄주는 끊으셨기에 알잔은 맹물로 채웠지만 건배사 내용만큼은 100% 원액처럼 진했다고 하더군요. 사장님은 젊은 시절 방갑중이라는 이름의 성실한 외신부 기자였고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고도 들었습니다. 사장님이 당당할 때 권력도 감히 조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십시오.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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