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에디터 영국 역사학자 티머시 가턴 애시 옥스퍼드대 교수는 학생 시절 동독에 머물면서 공부했다. 동독이 무너진 뒤, 그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문서에서 ‘로미오’라는 암호명으로 기록된 자신에 대한 방대한 비밀문서를 발견한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과의 대화까지 젊은 시절 일거수일투족이 담긴 문서는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파일>(The File)은 그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독재정권의 실상을 연구해 내놓은 책이다. 10만의 조직원과 20만의 비공식 정보원을 동원해 슈타지는 24시간 국민을 감시하고 밀고하게 했다. 반정부 인사, 계급의 적으로 찍힌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숙청됐다. 정권이 무너진 뒤 그 흔적은 방대한 파일의 모습으로 거대한 괴물처럼 드러났다. 지난해 이 정부의 전직 고위 관계자로부터 청와대가 관리하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있고, 명단이 점점 추가돼 1만명에 이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설마 싶었다. 문화체육관광부 당국자가 이 블랙리스트를 일일이 확인해 문화예술계 인사들에 대한 지원, 공연 가능 여부를 판단한다고 했다. 이 정부에선 현실이 ‘설마’보다 한 수 위다. 도종환 의원이 국감에서 공개한 문화예술위원회 회의록을 통해 청와대가 관리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확인됐다. 세월호 진상규명 서명을 하거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문화계 9473명이 청와대가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문서도 등장했다. ‘한복 순방’에 유독 공을 들이고 한류 드라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온 대통령은 “문화융성”을 주요 국정과제로 외쳤다. 여기에 절친 최순실씨 딸의 승마가 겹치면서, 청와대는 문화예술계에 집요하게 개입해왔다. 2013년 전국승마대회에서 최순실씨의 딸이 1등을 하지 못하자 최씨 쪽에서 편파판정 의혹을 제기했고, 이때 조사를 맡아 최씨 쪽에도 잘못이 있다고 보고한 문체부 국장과 과장은 대통령으로부터 “나쁜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고 한직으로 내쫓겼다가, 올해 “이 사람들이 아직도 있어요?”라는 대통령의 한마디로 강제로 공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에 찍히면 죽고, 최순실에게 방해가 되면 제거되는 공포 인사가 문체부 공무원들을 옥죄고 있다. 정부 관련 기관들의 전시에서 임옥상, 홍성담 등 비판적 작가들의 작품이 줄줄이 배제되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박근형 연출가의 작품들이 문화예술위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가 포기를 종용받거나 공연이 취소됐다. 문재인 전 대표 지지를 선언했던 이윤택 연출가는 지원에서 배제됐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는 <다이빙벨> 상영을 꼬투리 삼은 정부의 이용관 집행위원장 쫓아내기 때문에 정치검열 성토장으로 변했다. 청와대 감독의 ‘문화융성’은 코미디와 공포영화, 시대에 뒤떨어진 궁중사극이 뒤섞인 아수라가 되었다. 밀실에서 지휘한 교묘한 감시와 통제도 결국은 괴물처럼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화계 황태자’가 주도한 미르재단, 케이(K)스포츠재단을 둘러싼 추악한 내막들은 그 시작이다. 외압으로 지원을 포기해야 했던 박근형 연출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선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죽어간 이들, 현재 대한민국의 탈영병, 1945년 일본군 가미카제에 자원한 조선인 병사, 2004년 이라크에서 살해된 한국인, 2010년 이유 없이 죽어간 천안함 병사들의 고통이 서로 만난다. 곳곳에서 절망의 침몰 신호가 울리지만 대통령과 측근들은 거대한 성벽을 쌓고 궁정정치에 여념이 없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선 모든 국민은 불쌍하다. #그런데최순실은? minggu@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모든 국민은 불쌍하다 / 박민희 |
문화스포츠 에디터 영국 역사학자 티머시 가턴 애시 옥스퍼드대 교수는 학생 시절 동독에 머물면서 공부했다. 동독이 무너진 뒤, 그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문서에서 ‘로미오’라는 암호명으로 기록된 자신에 대한 방대한 비밀문서를 발견한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과의 대화까지 젊은 시절 일거수일투족이 담긴 문서는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파일>(The File)은 그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독재정권의 실상을 연구해 내놓은 책이다. 10만의 조직원과 20만의 비공식 정보원을 동원해 슈타지는 24시간 국민을 감시하고 밀고하게 했다. 반정부 인사, 계급의 적으로 찍힌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숙청됐다. 정권이 무너진 뒤 그 흔적은 방대한 파일의 모습으로 거대한 괴물처럼 드러났다. 지난해 이 정부의 전직 고위 관계자로부터 청와대가 관리하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있고, 명단이 점점 추가돼 1만명에 이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설마 싶었다. 문화체육관광부 당국자가 이 블랙리스트를 일일이 확인해 문화예술계 인사들에 대한 지원, 공연 가능 여부를 판단한다고 했다. 이 정부에선 현실이 ‘설마’보다 한 수 위다. 도종환 의원이 국감에서 공개한 문화예술위원회 회의록을 통해 청와대가 관리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확인됐다. 세월호 진상규명 서명을 하거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문화계 9473명이 청와대가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문서도 등장했다. ‘한복 순방’에 유독 공을 들이고 한류 드라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온 대통령은 “문화융성”을 주요 국정과제로 외쳤다. 여기에 절친 최순실씨 딸의 승마가 겹치면서, 청와대는 문화예술계에 집요하게 개입해왔다. 2013년 전국승마대회에서 최순실씨의 딸이 1등을 하지 못하자 최씨 쪽에서 편파판정 의혹을 제기했고, 이때 조사를 맡아 최씨 쪽에도 잘못이 있다고 보고한 문체부 국장과 과장은 대통령으로부터 “나쁜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고 한직으로 내쫓겼다가, 올해 “이 사람들이 아직도 있어요?”라는 대통령의 한마디로 강제로 공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에 찍히면 죽고, 최순실에게 방해가 되면 제거되는 공포 인사가 문체부 공무원들을 옥죄고 있다. 정부 관련 기관들의 전시에서 임옥상, 홍성담 등 비판적 작가들의 작품이 줄줄이 배제되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박근형 연출가의 작품들이 문화예술위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가 포기를 종용받거나 공연이 취소됐다. 문재인 전 대표 지지를 선언했던 이윤택 연출가는 지원에서 배제됐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는 <다이빙벨> 상영을 꼬투리 삼은 정부의 이용관 집행위원장 쫓아내기 때문에 정치검열 성토장으로 변했다. 청와대 감독의 ‘문화융성’은 코미디와 공포영화, 시대에 뒤떨어진 궁중사극이 뒤섞인 아수라가 되었다. 밀실에서 지휘한 교묘한 감시와 통제도 결국은 괴물처럼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화계 황태자’가 주도한 미르재단, 케이(K)스포츠재단을 둘러싼 추악한 내막들은 그 시작이다. 외압으로 지원을 포기해야 했던 박근형 연출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선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죽어간 이들, 현재 대한민국의 탈영병, 1945년 일본군 가미카제에 자원한 조선인 병사, 2004년 이라크에서 살해된 한국인, 2010년 이유 없이 죽어간 천안함 병사들의 고통이 서로 만난다. 곳곳에서 절망의 침몰 신호가 울리지만 대통령과 측근들은 거대한 성벽을 쌓고 궁정정치에 여념이 없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선 모든 국민은 불쌍하다. #그런데최순실은?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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