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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15 17:47 수정 : 2017.01.15 18:52

권혁철
지역에디터

지난해 아들이 재수를 했다. 아들이 고3 때는 물론 재수할 때도 나는 ‘대체로’ 무관심했다. 대입 성공의 3대 비결로 꼽히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가운데, 우리 집안은 아빠의 무관심만 유일하게 작동했다.

아들이 고3이 됐을 때 잠깐 입시에 관심을 둔 적은 있었지만 내가 뒤늦게 아들의 입시 준비에 끼어들 틈은 전혀 없었다. ‘아빠의 무관심’은 나로선 합리적 선택이었다. 지난 2년 아들의 입시 준비를 옆에서 지켜보며, 입시 제도에 대한 나의 불만과 불신은 깊어졌다. 수험생 자녀를 둔 내 또래들끼리 만나면 성토장이 벌어지곤 한다. 이런 자리에선 “학력고사 봐서 대학 갔던 우리 때가 지금보다 나았다”는 한탄도 빠지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선행교육규제법을 만들었지만, 겨울방학인 요즘 학원마다 선행학습이 한창이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낸 자료를 보면, 서울 한 학원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에게 미적분 등 고2 과정 수학을 가르치고(7년 선행), 다른 학원에선 초등학교 6학년에게 고2 순열조합을 가르친다(5년 선행). 의대 등에 입학하려는 학생이 이 수업을 듣는다고 한다.

2000년 이전까지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전국 대학 서열화가 이뤄졌다. 서울대의 위세는 여전하지만 현재 이과의 경우 대학 서열화 꼭대기를 전국 의대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달 중하순 대입 정시 결과 발표가 나면, 다음달 중순까지 전국 대학에서 신입생 도미노 현상이 벌어진다. 의대 지망생들이 최종 선택을 하면 서울대를 거쳐 그 밑에 있는 대학 신입생들이 줄줄이 연쇄 이동을 한다. 전국 대학들이 한 바퀴(추가합격 인원이 최초합격 모집인원과 같을 때), 두 바퀴(추가합격 인원이 모집인원의 2배)를 돌고, 세 바퀴를 돌기도 한다.

의대는 입시 먹이사슬에서 최상위 포식자 노릇을 하고 있다. 왜 수험생이 의대에 가려고 하는지는 누구나 안다. 그런데 의대는 등록금이 비싼데다 사교육 없인 여간해선 들어가기 어려운 좁은 문이다. 결국 가난한 집 아이가 의대에 들어가긴 무척 어렵다. 의대 입시에서 보듯 교육이 계층 이동 사다리가 아니라 계층 단절 바리케이드가 되고 있다.

나는 최근 네덜란드가 의대 신입생을 추첨으로 뽑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처음엔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우리처럼 네덜란드도 의대가 인기 있다고 한다. 나는 의대처럼 경쟁이 심한 대학은 성적순으로 뽑는 게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또 생명을 다루는 의대에는 가장 똑똑한 학생이 가는 게 맞다고도 믿었다.

그런데 왜 네덜란드는 의대 신입생을 추첨할까. 추첨제가 교육의 기회 평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의학에 뜻을 품은 모든 학생은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본다고 한다. 물론 현실을 반영해 고등학교 성적이 좋은 학생들의 추첨 할당비율이 높긴 하다. 또 성적뿐만 아니라 환자를 대하는 자세, 환자와의 소통 능력도 의사에겐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란다. 최근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공부 잘해 의사가 된 증인들을 통해, 성적이 좋은 학생이 좋은 의사가 될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직접 확인한 바 있다.

나는 서열화된 입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의대 추첨제 입학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최근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더 이상 불필요한 경쟁 없이 국민이 원하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자는 취지로 ‘대학입학보장제’를 제안하고 있다. 학생들이 어느 정도 성적 자격 기준을 갖추면 더 이상의 추가적인 부담을 요구하지 말고 대학입학을 완전히 보장하자는 것이다. ‘꿈같은 소리’란 반응이 나오겠지만, 의대 추첨제도 이와 비슷한 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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