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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18 18:30 수정 : 2017.01.18 21:24

김의겸
선임기자

지금은 까마득하지만 김무성 의원이 ‘대세론’을 만끽하던 시절이 있었다. 20주 연속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를 달렸다. 2위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 정도는 오차범위 밖으로 가볍게 밀어냈다. 불과 1년여 전이다.

그 무렵 기자는 김무성 부친의 친일 행적을 보도한 적이 있다.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는 제목이었다. 김 의원은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를 신청하는 한편 1억원의 손해배상과 반론보도를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기자는 꿀릴 게 없기에 물러설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나를 고소하라”고 맞서는 기사를 쓰기까지 했다. 몇 년씩 질질 끄는 민사소송이 아니라 검찰 수사를 통해 빠르고 깔끔하게 결판을 내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김 의원은 민사소송을 택했다. 소송은 1년 가까이 이어지더니 지난해 10월에야 1심 선고가 나왔다. <한겨레>의 완벽한 승리였다. 소송 진행 중에 1억원은 판사의 말 한마디에 김 의원 스스로 취하했고, 판결은 반론보도문조차 실어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김 의원은 곧 항소를 했다. 그토록 억울하고 분해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갑자기 항소를 취하했다. 왜 갑자기 포기한 걸까? 아마도 11월에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 때까지는 자신에게 불리한 부친 문제를 법적 다툼의 영역으로 미뤄놓으려 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소송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시간을 벌자는 목적이 더 컸던 셈이다.

김무성 의원의 사례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언론에 대처하는 자세’ 면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 전 총장은 “박연차, 반기문에 23만 달러 줬다”고 보도한 <시사저널>을 상대로 4일 언론중재위원회 중재를 신청하는 한편 10억원의 손해배상과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김무성보다 10배 많은 액수다. 그 언론중재위원회가 16일 열렸다. 기사를 쓴 김지영 기자는 꿀릴 게 없기에 물러설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언론중재위원회에 나가 “반 총장님이 큰 뜻을 품고 계시다면 민사소송이 아니라 검찰 수사로 명쾌하게 밝히자. 언론중재위에서 다투다 보면 시간만 버리지 않느냐. 형사로 하자”고 말했다. 그런데도 반 전 총장 쪽은 “사실관계를 더 파악해보자”며 심리 기일을 추가로 잡았다. 2월6일이다. 20일의 시간을 번 셈이다.

언론중재위가 열린 바로 그날 밤 반 전 총장은 기자들에게 폭탄주를 한잔씩 말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억울하다. 내가 박연차 돈을 받았다면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만두겠다고 약속하려고 했다. 그런데 조언하는 그룹에서 단정적으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서 언론중재위로 갔다. 어차피 소송 결과는 대선 끝나고 나오는 거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차피’가 아니다.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고소를 하면 금세 결과가 나온다. 검찰이 대검 캐비닛 문을 열고 ‘박연차 리스트’만 꺼내 보면 진실의 윤곽이 드러난다. 한나절도 안 걸릴 일이다. 그런데도 반 전 총장은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 뭔가 미심쩍다. 그러니 시사저널에 이어 중앙일보, 경향신문, 노컷뉴스가 박연차 관련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한겨레>도 18일치에 “반기문 아무리 부인해도 ‘박연차 리스트’에 적힌 건 팩트”라고 못박아 썼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정말 뭐 있는 거 아냐?”라는 의심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날 법하다. 우리는 철저하게 검증하지 못한 결과가 어떤지를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처절하게 배우고 있다. 검증의 칼끝을 미끄러지듯 헤엄치며 피해갈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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