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디터 ‘이건희 회장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잠깐 들어 200여명의 취재진으로 가득 찬 회견장을 둘러보는 이 회장의 눈앞에는 지난 20여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듯했다.’ 2008년 4월21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영일선 퇴진을 밝히는 현장에 있었다. 삼성의 쇄신안은 ‘위기 모면용’의 성격이 짙었다. 지배구조 개선과 같은 본질적 해법도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총수의 자진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및 독립계열사 체제 전환 약속 등은 일정 정도 평가를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법학자 43명의 고발로 처음 알려진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을 비롯한 수많은 위법과 편법이 전략기획실 주도로 이뤄진 사실이 수년 만에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당시엔 이 회장의 구속 여부가 아니라 기껏해야 기소 여부가 쟁점이었다. 실제 조준웅 특검은 불법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배임 혐의로 이 회장 등을 불구속 기소했을 뿐 비자금·불법로비 의혹 등에선 무혐의 처분을 내리며 면죄부만 안겨줬다. 그만큼 우리 사법체계에서 삼성이라는 성역은 강고했고, 삼성의 변화는 삼성의 ‘결단’에 맡길 수밖에 없어 보였다. 2년 뒤, 이 회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면복권을 거쳐 복귀했다. 지난주 이재용 부회장이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가는 모습을 보며 9년 전 상황이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말 세탁’ 의혹에서 보듯 삼성은 승계구도 완성을 위해 이번에도 법률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를 감추기 위해서만 치밀하게 움직였다. 9년 전 이학수 부회장은 “회장님은 앞으로 이재용 전무가 주주나 임직원, 사회로부터 경영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승계할 경우 회사에도 이 전무에게도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지만, 삼성의 행태에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반면 세상은, 사람들은 많이 바뀌었다. ‘수저론’이 사회의 공식처럼 당연시되는 지금, 반칙과 부당한 청탁, 특혜가 얼마나 보통 사람들의 삶을 옥죄고, 열패감과 좌절을 안기는지 대다수가 절감하고 있다. 대가성을 따질 필요도 없이 몇만원의 선물이나 식사까지 처벌하는 ‘김영란법’이 시행되는 시대가 됐다.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도 생활 속 작은 청탁과 부정부패의 뿌리를 원천적으로 끊어내자는 데 다수가 합의했다. 그런데 최고권력과 최고재벌의 결탁에 면죄부를 준다? 소가 웃을 일이다. 433억 지원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삼성의 항변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평범한 이들이 바랐던 건 간단하다. 재벌 총수도 적어도 법 앞에선 보통 사람들 대하듯이 대해달라, 책임질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임을 보여달라. 그런 의미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은 ‘특검의 개가’나 ‘영장판사의 용기’가 아니라 이제야 우리 사법체계가 보통 사람들의 인식을 따라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전방위적으로 시험대에 올라 있다.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의 구속 이후 교수들 사이에선 “학생 점수 고쳐준 걸로 하면 쇠고랑 찰 사람 부지기수”란 말들이 나왔다. 장시호가 3차례 학사경고에도 졸업한 사실이 드러난 뒤 교육부가 체육특기생에 대한 성적·출석 전수 감사에 들어가자 “언제는 학교 명예를 높이는 학생을 배려해주라더니…” 같은 볼멘소리들이 들려왔다. 돈과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관행’이라며 합리화했던 행위들에, 이제 막 법적 잣대를 들이대고 따져보기 시작했다. 법정에서의 최종 판단은 아직 예단할 수 없지만, 이 과정 자체가 절망과 냉소만 넘치던 사회에 ‘그래도 변하고 있다’는 작은 신호 아니겠는가 .dora@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김영란과 이재용 / 김영희 |
사회에디터 ‘이건희 회장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잠깐 들어 200여명의 취재진으로 가득 찬 회견장을 둘러보는 이 회장의 눈앞에는 지난 20여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듯했다.’ 2008년 4월21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영일선 퇴진을 밝히는 현장에 있었다. 삼성의 쇄신안은 ‘위기 모면용’의 성격이 짙었다. 지배구조 개선과 같은 본질적 해법도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총수의 자진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및 독립계열사 체제 전환 약속 등은 일정 정도 평가를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법학자 43명의 고발로 처음 알려진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을 비롯한 수많은 위법과 편법이 전략기획실 주도로 이뤄진 사실이 수년 만에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당시엔 이 회장의 구속 여부가 아니라 기껏해야 기소 여부가 쟁점이었다. 실제 조준웅 특검은 불법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배임 혐의로 이 회장 등을 불구속 기소했을 뿐 비자금·불법로비 의혹 등에선 무혐의 처분을 내리며 면죄부만 안겨줬다. 그만큼 우리 사법체계에서 삼성이라는 성역은 강고했고, 삼성의 변화는 삼성의 ‘결단’에 맡길 수밖에 없어 보였다. 2년 뒤, 이 회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면복권을 거쳐 복귀했다. 지난주 이재용 부회장이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가는 모습을 보며 9년 전 상황이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말 세탁’ 의혹에서 보듯 삼성은 승계구도 완성을 위해 이번에도 법률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를 감추기 위해서만 치밀하게 움직였다. 9년 전 이학수 부회장은 “회장님은 앞으로 이재용 전무가 주주나 임직원, 사회로부터 경영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승계할 경우 회사에도 이 전무에게도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지만, 삼성의 행태에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반면 세상은, 사람들은 많이 바뀌었다. ‘수저론’이 사회의 공식처럼 당연시되는 지금, 반칙과 부당한 청탁, 특혜가 얼마나 보통 사람들의 삶을 옥죄고, 열패감과 좌절을 안기는지 대다수가 절감하고 있다. 대가성을 따질 필요도 없이 몇만원의 선물이나 식사까지 처벌하는 ‘김영란법’이 시행되는 시대가 됐다.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도 생활 속 작은 청탁과 부정부패의 뿌리를 원천적으로 끊어내자는 데 다수가 합의했다. 그런데 최고권력과 최고재벌의 결탁에 면죄부를 준다? 소가 웃을 일이다. 433억 지원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삼성의 항변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평범한 이들이 바랐던 건 간단하다. 재벌 총수도 적어도 법 앞에선 보통 사람들 대하듯이 대해달라, 책임질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임을 보여달라. 그런 의미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은 ‘특검의 개가’나 ‘영장판사의 용기’가 아니라 이제야 우리 사법체계가 보통 사람들의 인식을 따라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전방위적으로 시험대에 올라 있다.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의 구속 이후 교수들 사이에선 “학생 점수 고쳐준 걸로 하면 쇠고랑 찰 사람 부지기수”란 말들이 나왔다. 장시호가 3차례 학사경고에도 졸업한 사실이 드러난 뒤 교육부가 체육특기생에 대한 성적·출석 전수 감사에 들어가자 “언제는 학교 명예를 높이는 학생을 배려해주라더니…” 같은 볼멘소리들이 들려왔다. 돈과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관행’이라며 합리화했던 행위들에, 이제 막 법적 잣대를 들이대고 따져보기 시작했다. 법정에서의 최종 판단은 아직 예단할 수 없지만, 이 과정 자체가 절망과 냉소만 넘치던 사회에 ‘그래도 변하고 있다’는 작은 신호 아니겠는가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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