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부문장 겸 총괄기획 에디터 포항 지진 여드레 만에 다시 닥친 수능일 아침, 외가와 친가 쪽에서 잇따라 전화를 받은 둘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시험은 내가 보는데 왜 주변 사람들이 더 난리지?” 그녀의 굼뜬 동작이 마뜩잖았던 나는 순간 뜨끔했다. 시험장 부근에 내려주며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아무 말’ 한마디 뒤통수에 날리고는 곧장 차를 몰았다. 평소보다 잘 뚫리는 길을 달려 여유 있게 신문사에 도착하고서야 직장인 출근 시간이 한 시간 늦춰진 덕을 본 사실을 알아챘다. 즐거울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는 이 이벤트에 온 나라가 올인하는 날이면 신문도 덩달아 ‘클리셰’에 갇히고 만다. 수험생 부모의 기도하는 두 손과 수험생을 태운 경찰 오토바이 사진은 빠질 수 없는 레퍼토리다. 올해 <한겨레>는 ‘조금’ 달랐다. 이 전국적인 소동을 먼발치로 곁눈질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어느 10대의 참극이 1면 머리기사로 올랐다. 교육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노동착취를 숨죽여 감내하다 고장 난 기계에 짓눌려 스러진 열여덟 살 민호, 그리고 현장실습생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수많은 민호들이 사회적 존재로서 질량을 얻는 것은, 하지만 지독히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다. 대학 비진학자들의 산술적인 지분은 30%를 넘지만, 현실의 도표에서는 정확히 0%다. 20여년 전 첫째가 태어났을 때, 나는 입시지옥에서 해방된 채 성년을 맞을 그녀의 미래를 떠올렸다. 동세대인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을 사회변혁운동에 헌신한 우리 세대가 학부모가 될 때쯤이면 교육은 약육강식의 쟁탈 대상이 아닌 공공선을 추구하는 장소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착각이었다.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386은 역사상 최대의 사교육 공급자이자 수요자가 됐으며, 그 시장에서 치맛바람과 바짓바람이 나란히 경쟁하는 초유의 성평등을 달성했다. 그 열정의 1%만 현장실습생들에게 보냈어도 죽음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을까. 이 물음 또한 나를 ‘셀프사면’ 하는 ‘아무 말’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386은 사회 진출 이후 다양한 갈래로 빠르게 세속화했다. 그러나 교육 문제에서만큼은 지금도 정의의 이름으로 대동단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법을 지키며 이득과 손실에서 마땅한 것 이상이나 이하를 갖지 않으려는 품성 상태”라고 정의했다. 준법과 능력에 따른 분배! 386은 교육에 관한 한 반칙을 끔찍이 싫어한다. 서열화된 교육자원을 성적에 어울리지 않게 요구하는 거야말로 반칙 중의 반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실한 신봉자가 된 386 앞에 남은 정의 실현의 과제는 핏줄의 능력을 최대치로 길러주는 것뿐이었다. 386이 교육 문제에서 유난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하나로 환원할 수 없지만, 이 세대가 역사상 최고의 엘리트 의식을 가진 세대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태일의 벗은 될 수 있어도 전태일의 부모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숨어 있던 엘리트주의는 교육 앞에서 민낯을 드러낸다. 젊어서 전태일의 벗이고자 했던 386의 자녀들은 사회학자 오찬호의 책 제목대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고 말하는 세대가 됐다. 취임 뒤 첫번째 업무 지시로 역사 국정교과서를 폐지하도록 했던 대통령이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규정한 행정해석을 바꾸도록 지시하지 않는 속사정은 뭘까. 우리 사회의 연대와 민주주의가 교육 앞에서 멈춰 서는 것은 불행하다. 수능이 끝난 며칠 뒤, 둘째의 중학교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세월호 전시장이나 촛불집회 현장을 함께 오가며 맛집 순례를 했던 친구다. 그녀는 특성화고에 진학했는데, 이번에 첫 월급을 탔다며 한턱내겠다고 한다. 이젠 술을 권해봐야겠다. 닥쳐온 거친 삶을 위하여! jona@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조금 다른 수능일은 오지 않았다 / 안영춘 |
디지털 부문장 겸 총괄기획 에디터 포항 지진 여드레 만에 다시 닥친 수능일 아침, 외가와 친가 쪽에서 잇따라 전화를 받은 둘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시험은 내가 보는데 왜 주변 사람들이 더 난리지?” 그녀의 굼뜬 동작이 마뜩잖았던 나는 순간 뜨끔했다. 시험장 부근에 내려주며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아무 말’ 한마디 뒤통수에 날리고는 곧장 차를 몰았다. 평소보다 잘 뚫리는 길을 달려 여유 있게 신문사에 도착하고서야 직장인 출근 시간이 한 시간 늦춰진 덕을 본 사실을 알아챘다. 즐거울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는 이 이벤트에 온 나라가 올인하는 날이면 신문도 덩달아 ‘클리셰’에 갇히고 만다. 수험생 부모의 기도하는 두 손과 수험생을 태운 경찰 오토바이 사진은 빠질 수 없는 레퍼토리다. 올해 <한겨레>는 ‘조금’ 달랐다. 이 전국적인 소동을 먼발치로 곁눈질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어느 10대의 참극이 1면 머리기사로 올랐다. 교육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노동착취를 숨죽여 감내하다 고장 난 기계에 짓눌려 스러진 열여덟 살 민호, 그리고 현장실습생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수많은 민호들이 사회적 존재로서 질량을 얻는 것은, 하지만 지독히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다. 대학 비진학자들의 산술적인 지분은 30%를 넘지만, 현실의 도표에서는 정확히 0%다. 20여년 전 첫째가 태어났을 때, 나는 입시지옥에서 해방된 채 성년을 맞을 그녀의 미래를 떠올렸다. 동세대인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을 사회변혁운동에 헌신한 우리 세대가 학부모가 될 때쯤이면 교육은 약육강식의 쟁탈 대상이 아닌 공공선을 추구하는 장소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착각이었다.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386은 역사상 최대의 사교육 공급자이자 수요자가 됐으며, 그 시장에서 치맛바람과 바짓바람이 나란히 경쟁하는 초유의 성평등을 달성했다. 그 열정의 1%만 현장실습생들에게 보냈어도 죽음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을까. 이 물음 또한 나를 ‘셀프사면’ 하는 ‘아무 말’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386은 사회 진출 이후 다양한 갈래로 빠르게 세속화했다. 그러나 교육 문제에서만큼은 지금도 정의의 이름으로 대동단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법을 지키며 이득과 손실에서 마땅한 것 이상이나 이하를 갖지 않으려는 품성 상태”라고 정의했다. 준법과 능력에 따른 분배! 386은 교육에 관한 한 반칙을 끔찍이 싫어한다. 서열화된 교육자원을 성적에 어울리지 않게 요구하는 거야말로 반칙 중의 반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실한 신봉자가 된 386 앞에 남은 정의 실현의 과제는 핏줄의 능력을 최대치로 길러주는 것뿐이었다. 386이 교육 문제에서 유난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하나로 환원할 수 없지만, 이 세대가 역사상 최고의 엘리트 의식을 가진 세대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태일의 벗은 될 수 있어도 전태일의 부모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숨어 있던 엘리트주의는 교육 앞에서 민낯을 드러낸다. 젊어서 전태일의 벗이고자 했던 386의 자녀들은 사회학자 오찬호의 책 제목대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고 말하는 세대가 됐다. 취임 뒤 첫번째 업무 지시로 역사 국정교과서를 폐지하도록 했던 대통령이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규정한 행정해석을 바꾸도록 지시하지 않는 속사정은 뭘까. 우리 사회의 연대와 민주주의가 교육 앞에서 멈춰 서는 것은 불행하다. 수능이 끝난 며칠 뒤, 둘째의 중학교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세월호 전시장이나 촛불집회 현장을 함께 오가며 맛집 순례를 했던 친구다. 그녀는 특성화고에 진학했는데, 이번에 첫 월급을 탔다며 한턱내겠다고 한다. 이젠 술을 권해봐야겠다. 닥쳐온 거친 삶을 위하여!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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