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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03 21:29 수정 : 2017.12.03 21:31

이재명
디지털 에디터

지난달 23일 인천공항에서 ‘두 개의 정의’가 충돌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방안을 둘러싼 공청회에서 둘은 서로에게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당신들 몫을 빼앗자는 게 아니다. 같은 일터에서 일하는 우리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아달라”는 이들에게 정규직은 “결과의 평등 노(NO), 기회의 평등 예스(YES)”라는 피켓을 들이밀며 외면했다.

남들보다 덜 놀고 더 치열하게 준비해 바늘구멍 같은 채용문을 뚫은 정규직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들어온 비정규직이 같은 회사 직원이 되는 걸 수용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갈수록 채용 기회마저 줄어드는데다 ‘빽과 돈’으로 거래되는 일자리를 지켜보며 느꼈을 박탈감도 지금의 자리에 더 큰 애착을 갖게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정규직화된 비정규직이 자신의 몫을 확대할 기회를 제한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의 정의가 상대에겐 불의가 되고, 상대의 정의가 나에겐 불의가 되는 서글픈 현실이다. 불행히도 한국 사회는 ‘서바이벌’이 삶의 준거가 되는 시대를 관통해왔다. 20년 전 외환위기는 고용불안과 임금격차를 키워 너도나도 안정성을 좇는 경쟁에 매달리게 했다. 하나이던 노동자는 여럿으로 분열됐다. 아이엠에프(IMF)의 유산과 패배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다. 정규직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다.

이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더라도 헌신과 양보에 기반을 둔 ‘아름다운 연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대 역시 ‘제로섬 게임’의 양상을 띤다. 다만 이런 ‘주고-받기’가 흥정이 아닌 연대가 되는 건 공동체의 이익을 키우기 때문이다. ‘노-노 연대’의 역사적 이정표를 세운 스웨덴의 연대임금이 출발부터 숭고했던 건 아니다. 1920년대 이뤄진 스웨덴의 공업화는 극심한 노사문제를 불러왔다. 상대적으로 고임금 부문이던 건설노조는 무시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임금인상 경쟁에 불이 붙자 집값이 폭등했다(인플레이션). 그 고통은 특히 저임금에 시달리던 금속노조 조합원들에게 집중됐다. 이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좇아 이동하면서 조합원도 급감했다. 이 와중에 1930년 전 세계를 휩쓴 경제공황의 쓰나미까지 몰려왔다. 당시 전국노동조합연합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던 금속노조는 공멸의 위기감에 1933년 건설노조 단체협상에 직접 개입해 평균임금의 두배 가까이 받던 건설노조의 임금을 1.3배로 억제하는 조처를 했다.

‘위기 안정화 대책’의 하나였던 연대임금은 그로부터 20년가량 지난 1951년에야 ‘동일 가치 노동, 동일 임금’으로 개념이 명확해졌다. 안착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당근책’이 제공됐음은 물론이다. 우선 실업 공포로부터 노동자를 해방시켰다. 높은 실업급여를 제공하고 재취업을 돕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탄생한 배경이다. 또 물가인상을 강력하게 억제하고 저렴한 공공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했다. 의료와 교육 역시 공공성을 높였다. 요컨대 노동자에게 욕망을 줄이도록 강요하는 대신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을 사회화해 개개인의 부담을 줄여줌으로써 양보를 끌어냈다. 그러자 ‘결과의 평등’이 정의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아졌다.

합리적인 사람들 사이에도 합당한 의견의 불일치는 발생한다. 도덕적·종교적·이념적으로 조정 불가능해 보이는 갈등을 조정해 사회통합을 이뤄내는 게 정치의 존재 이유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충돌하는 정의를 공존의 장으로 끌어낼 당근과 채찍은 무엇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정의로운 결과와 이를 실현할 구체적 방안이 점점 더 궁금해진다.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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