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에디터 오래전 인터뷰할 때였다. 한창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그는 “어제 밤샘작업을 하느라 너무나 피곤한데 어디 편한 데 가서 누워서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황당했지만 이미 소문의 ‘예방주사’를 맞고 나간 터라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커피숍에서 나오는데 그 사람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불쾌했지만, 이상하게 손을 뺄 수 없었다. 정색하고 손을 빼면 과잉반응이 아닐까? 주요 취재원인데 괜히 어색하게 헤어져서 다시 못 보게 되면 어떡하지? 이런 사람이 한둘도 아니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그제서야 그의 손을 슬쩍 뿌리쳤다. 들불처럼 일어난 ‘미투 운동’을 보면서 그때 생각이 다시 났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어린 여성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기자였다. 취재원 입장에서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권력’을 한 줌 쥐고 있었던 거다. 그때 나의 위치가 기자가 아니라 그의 아래에서 일거리를 잡고자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말을 적당히 무시할 수 있었을까.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하면서도 손을 뿌리치고 정색하지 못했는데, 그렇지 못한 관계라면 어땠을까. <피디수첩>의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이 방영된 뒤 후폭풍이 거세다. 인터뷰에 응한 피해자 한명이 소송을 걸고 문제제기를 했을 때도 여론이 크게 움직이지 않다가 촬영장에서의 성폭력에 대한 구체적 폭로가 나오자 모두가 경악했다. 김기덕에 대한 소문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던 영화계 사람들이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김기덕 감독은 영화계의 ‘돌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두가지 면에서 돌출적이었다. 우선 1996년 <악어>로 데뷔한 뒤 기존의 영화 문법과 다른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그 돌출성이 일부 평론가들에게 포착됐다. 다른 하나는 ‘출신성분’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제도 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성장했다. 작품으로도, 영화계의 네트워크로도 불편한 존재였다. 소수의 팬을 가지고 있던 그의 작품 이력에서 <섬>과 <나쁜 남자>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기덕의 작품 미학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그 논쟁, 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에 대한 논란과 함께 그의 촬영 현장에 대한 불길한 소문도 하나씩 퍼져나갔다. 쌓이고 퍼져나가며 영화판에 기웃거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게 된 소문에 대해 누구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작품이 대중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해도 김기덕은 여전히 영화계에서 돌출적인 존재였기에 어느 누구도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짓을 한 건가 묻지 않았다. 두려웠던 걸까, 성가셨던 걸까. 그렇게 침묵하는 동안 그의 촬영 현장 어딘가에선 밤마다 부서져라 방문을 두드리는 손, 무차별적인 강간과 강간 사실에 대해 농담처럼 떠드는 목소리들, 상상만으로도 무간지옥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장면들이 펼쳐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빈집>이 베네치아(베니스)와 베를린 등 세계적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들고 오자 영화계는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김기덕은 누구나 박수 치는 거장 감독이 되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누구도 거장 감독에게 시비를 붙고 싶지 않았으리라. 성가셔서 그에게 묻지 않았을지도 모를 질문들을 이제는 두려워서 물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십년이 더 지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영화계의 충격과 분노’라는 후속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과연 영화계가, 그리고 기자인 나를 포함한 영화산업의 관련자들이 ‘나도 충격’이라고 말할 자격, 있을까. dmsgud@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 김은형 |
문화스포츠 에디터 오래전 인터뷰할 때였다. 한창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그는 “어제 밤샘작업을 하느라 너무나 피곤한데 어디 편한 데 가서 누워서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황당했지만 이미 소문의 ‘예방주사’를 맞고 나간 터라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커피숍에서 나오는데 그 사람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불쾌했지만, 이상하게 손을 뺄 수 없었다. 정색하고 손을 빼면 과잉반응이 아닐까? 주요 취재원인데 괜히 어색하게 헤어져서 다시 못 보게 되면 어떡하지? 이런 사람이 한둘도 아니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그제서야 그의 손을 슬쩍 뿌리쳤다. 들불처럼 일어난 ‘미투 운동’을 보면서 그때 생각이 다시 났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어린 여성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기자였다. 취재원 입장에서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권력’을 한 줌 쥐고 있었던 거다. 그때 나의 위치가 기자가 아니라 그의 아래에서 일거리를 잡고자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말을 적당히 무시할 수 있었을까.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하면서도 손을 뿌리치고 정색하지 못했는데, 그렇지 못한 관계라면 어땠을까. <피디수첩>의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이 방영된 뒤 후폭풍이 거세다. 인터뷰에 응한 피해자 한명이 소송을 걸고 문제제기를 했을 때도 여론이 크게 움직이지 않다가 촬영장에서의 성폭력에 대한 구체적 폭로가 나오자 모두가 경악했다. 김기덕에 대한 소문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던 영화계 사람들이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김기덕 감독은 영화계의 ‘돌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두가지 면에서 돌출적이었다. 우선 1996년 <악어>로 데뷔한 뒤 기존의 영화 문법과 다른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그 돌출성이 일부 평론가들에게 포착됐다. 다른 하나는 ‘출신성분’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제도 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성장했다. 작품으로도, 영화계의 네트워크로도 불편한 존재였다. 소수의 팬을 가지고 있던 그의 작품 이력에서 <섬>과 <나쁜 남자>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기덕의 작품 미학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그 논쟁, 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에 대한 논란과 함께 그의 촬영 현장에 대한 불길한 소문도 하나씩 퍼져나갔다. 쌓이고 퍼져나가며 영화판에 기웃거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게 된 소문에 대해 누구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작품이 대중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해도 김기덕은 여전히 영화계에서 돌출적인 존재였기에 어느 누구도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짓을 한 건가 묻지 않았다. 두려웠던 걸까, 성가셨던 걸까. 그렇게 침묵하는 동안 그의 촬영 현장 어딘가에선 밤마다 부서져라 방문을 두드리는 손, 무차별적인 강간과 강간 사실에 대해 농담처럼 떠드는 목소리들, 상상만으로도 무간지옥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장면들이 펼쳐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빈집>이 베네치아(베니스)와 베를린 등 세계적 영화제에서 트로피를 들고 오자 영화계는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김기덕은 누구나 박수 치는 거장 감독이 되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누구도 거장 감독에게 시비를 붙고 싶지 않았으리라. 성가셔서 그에게 묻지 않았을지도 모를 질문들을 이제는 두려워서 물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십년이 더 지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영화계의 충격과 분노’라는 후속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과연 영화계가, 그리고 기자인 나를 포함한 영화산업의 관련자들이 ‘나도 충격’이라고 말할 자격, 있을까.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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