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3.14 18:44
수정 : 2018.03.14 22:33
신승근
정치에디터
“모든 걸 집어삼킨다. 지방선거도 미투판에 실종됐다.” “왜, 보수는 멀쩡한데, 진보 진영만 제물이 되는가.” 이른바 진보 진영 인사들 사이에선, 미투운동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비서의 성폭행 폭로로 위선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비비케이 실소유주 의혹’을 제기하며 이명박 전 대통령과 맞짱을 뜨다가 옥고를 치른 정봉주 전 의원은 성추행 논란에 휩싸여 언론사와 공방 중이다. 민병두 의원은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 미투운동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며 ‘좌파 음모론’을 제기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까지 미투를 지지하는 판국이니, 이들의 당혹감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과 이른바 진보를 자처해온 몇몇 인사의 태도야말로 우려스럽다. 당혹한 더불어민주당은 ‘스텝’이 꼬였다. 안 전 지사는 심야 최고위원회의에서 2시간여 만에 제명하기로 했지만,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민병두 의원의 사퇴는 말린다. 원내 제1당 지위를 잃을까봐 주판알을 튀기는 모양새다.
미투운동에 일찌감치 ‘공작 이용 가능성’을 제기했던 김어준씨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진보 인사들만 엮이는 현실을 언급하며 “미투를 공작으로 이용하고 싶은 자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참여정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교수는 “피해자 여성의 용기있는 폭로가 ‘사이비 미투’에 오염되기 시작했다”며 가세했다. 그는 “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일회적인 성추행, 그것도 당시 권력이 없는 사람의 미수 행위는 미투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는 ‘미투 감별법’까지 제시했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 극히 일부는 경청할 만하다. ‘익명으로 증거나 논리도 미약한… 폭로의 경우 언론은 보도에 신중을 기할 의무가 있다’는 조 교수의 글은 되새겨볼 만하다. 하지만 아무리 ‘음모론’을 제기하고, ‘사이비 미투 오염론’을 얘기해도, 피해자들이 폭로한 성폭행, 성폭력, 성추행이 바뀌지는 않는다. 현재까지 음모를 주도하는 주체도 불분명하다. 서지현 검사, 최영미 시인, 김지은 비서까지 실명으로 성폭력을 고발한 이들이 어떤 음모에 조종당했다는 증거도 없다. 신상이 털릴 위험을 감수하며 용기를 낸 익명의 고발자들이 어떤 이익을 봤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반면, 이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미투운동의 확산을 막고 왜곡할 위험성은 크다. 미투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특히 정치권의 미투는 고작 작은 도랑 한쪽을 텄을 뿐이다. 정치부 기자로 성희롱 장면을 보기도, 전해 듣기도 했다. 술자리에 꼭 젊은 여기자를 불러내려는 의원들, 맥주잔에 소주 알잔을 떨궈 폭탄주를 만들며 “넣는 건 역시 남자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여기자를 “누구는 동양화, 누구는 서양화”라고 공공연히 떠들던 정치 거물도 있었다.
“○○○ 기자는 왜 아침마다 내가 목욕할 때, 전화를 하는 거야”라는 성희롱 발언과 ‘나쁜 손버릇’으로 남자 기자들의 기피 대상이 된 여성 의원도 있었다. 동료·후배 여성 정치인을 향해 “가시내가 뭘 안다고 나서냐”고 호통치던 실력자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잘못된 손버릇, 입버릇으로 이미 홍역을 치렀지만, 지금도 대부분 건재하다. ‘국회의사당’의 미투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들춰내 공개할까 말까를 망설이는 미래의 미투 고발자들을, 보수-진보라는 진영논리에 찌든 음모론으로, 사이비 미투와 ‘미 온리’라는 해괴한 논리로 입막음해서는 안 된다. 그건 또다른 2차 가해로, ‘미투운동을 가로막는 꼼수’가 될 수 있다.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피해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때문이다. 가해자에겐 스스로 음모의 희생양, 보수의 공격에 쓰러진 제물로 정당화할 명분을 준다. 음모론, 사이비 미투 경계론은 더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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