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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20 09:30 수정 : 2019.01.21 13:03

이지은
정치사회에디터

통장 잔고 0원.

2016년 9월21일 세상을 떠날 때 그의 통장에는 한푼도 없었다. 유품이라고는 닳아빠진 양복과 이부자리, 책상 2개 정도였다. 평생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울타리 역할을 마다 않고, 꼬깃꼬깃 현금을 모아 의미 있는 일에 기부했다고 한다. 아픈 이들을 살리라며 장기 기증을 유언했다. 전두환이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부른 고 조비오 신부 얘기다.

조비오 신부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사회 인사들이 나섰던 ‘죽음의 행진’에 참여했다. 넉달간 옥고도 치렀다. 89년 국회 ‘광주 청문회’에 나가 신군부의 학살을 증언했다. “신부인 나조차도 손에 총이 있으면 쏘고 싶었다”는 심정을 털어놨다. 특히 계엄군이 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 쏘는 것을 봤다는 민감하고도 중요한 증언을 했다. 군의 주장대로 시위 진압이나 자위권 차원이 아니라 시민들에 대해 집단 살상을 시도한 셈이기 때문이다. 헬기 사격은 2017년 4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185곳의 총탄 흔적에 대해 “헬기 사격에 의한 것”이라는 감식 결과를 내놓기까지 ‘증언’으로만 존재했다.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2017년 5·18 민주화운동 37돌 기념식에서 김소형씨가 ‘슬픈 생일’이라는 편지를 낭독했다. 그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창문으로 날아든 계엄군 총탄에 아버지를 잃었다. ‘5·18둥이’가 울며 단상을 내려가려 할 때 문재인 대통령이 그를 뒤쫓아가 안아주었다.

5·18 민주유공자 3단체와 5·18기념재단 관계자, 유가족 등이 지난 1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자유한국당의 5·18진상규명조사위 위원 추천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한국당 원내대표실 앞으로 이동해 나경원 원내대표 면담을 요구하며 추천위원 검증을 촉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 장면은 아직 미흡한 5·18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것이란 기대로 이어졌다.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 아래 펼쳐진 민간인 학살은 1988~89년 국회 광주 청문회, 1994~95년 검찰 수사, 참여정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등의 조사를 거쳤으나, 증언 거부와 자료 수집 한계 등으로 인해 발포 명령자를 밝히지 못했다. 전쟁 성범죄와 같은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그간의 고통을 말하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9월 시행된 특별법에 의해 출범하게 될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 첩첩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일들을 보면 참담하기까지 하다. 자유한국당은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극우 인사에게 붙들려 조사위원 추천을 넉달이나 지연시켰다. 새해 초 <한겨레> 24시팀은 ‘전두환 골프 목격담’ 취재에 들어갔다. 39년 전 광주에서 자식을 잃은 늙은 어머니들이 ‘3한 4미’라는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서울 연희동에서, 국회에서, 시위와 농성을 하고 있을 때다. 알츠하이머 때문에 재판에 못 나간다는 전두환과 자기 남편이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이순자가 지난달 6일 세금 안 내서 빨간 압류 딱지 붙은 연희동 집을 나와 경찰 4명의 경호를 받으며 강원도 골프장을 찾아 골프를 쳤다. 이들의 집 앞에서 가슴을 치고 고함을 치던 늙은 어머니들은 지난 14일 국회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실 앞에 쓰러졌다. 막판에 광주 진압군 대대장까지 조사위원으로 검토했던 한국당은 이날 결국 5·18을 헐뜯어온 극우 인사들을 추천했다.

진상규명조사위의 앞길이 순탄치 않아 보인다. “5월의 사제”로 불렸던 고 조비오 신부의 따뜻한 마음과 굽히지 않는 용기를 다시 떠올려본다. 진실 찾기는 이제 시작이다. 자유한국당이 전두환과 함께 사라질 극우 정당이 아니라 역사에 부끄럽지 않을 보수 정당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각하 골프’에 분노한 많은 분들이, 그 분노를 진실 찾기의 자양분으로 삼아주셨으면 좋겠다.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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