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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13 18:12 수정 : 2019.03.14 12:19

이재성
탐사에디터

표현의 자유 탄압에 열을 올리던 독재(향수)세력은 정권을 잃고 나면 ‘역설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한다. ‘군대여 일어나라’는 태극기 부대의 쿠데타 선동에 대해 검찰은 최근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서 “집회 현장의 발언 내용만으로 이들이 국헌 문란의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행위가 없었으므로 내란선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이었다.

태극기 부대의 쿠데타 선동은 표현의 자유 영토 안에 속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이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는 ‘표현’의 자유까지 허용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대를 동원해 평화로운 촛불집회를 진압하라는 이들의 주장은 타인의 ‘표현의 자유’를 공격하는 행위다. 두차례 군사 쿠데타를 경험한 나라에서 노골적으로 군부를 선동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권이 무한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려면 일정한 한계는 불가피하다. 나의 자유와 권리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 앞에서 멈춰야 한다. 헌법 21조와 37조가 그 한계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독재(향수)세력이 헌법이 열거한 ‘제한’ 사유(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정권 안보를 위해 편의적으로 활용해왔다는 점이다. 그들이 수호했던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아니라 ‘반공기득권체제’였고, 공안(공공안녕)은 정권안녕의 다른 말이었다. 요컨대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 숱하게 벌어졌던 표현의 자유 쟁취 투쟁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정권의 자의적인 해석 및 적용에 대한 반대였지, 표현의 자유가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통령이나 공권력에 대한 풍자와 비판, 예술 분야의 표현 자유는 무제한 허용해야 한다고 본다. 지난 정권 시절 ‘쥐그림’이나 ‘근혜공주’ 포스터 같은 예술 작품을 둘러싸고 작가가 구속되거나 대통령 명예훼손 논란이 있었던 건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덜 성숙했다는 증거다. ‘공적 인격’인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표현은 자유로이 보장해야 한다. 지금도 광화문에 나가 보면 문재인 대통령을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처럼 묘사한 포스터가 24시간 길거리에 전시돼 있다.

표현의 자유 논란이 빚어지는 또 하나의 쟁점이 ‘5·18 왜곡(망언)처벌법’ 제정 여부다. 거칠게 나누면, 미국식 자유주의와 독일식 불관용 원칙이 부딪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 나라의 역사와 경험에 따라 달리 적용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린 비교적 최근에 통한의 집단학살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독일의 길을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특히 독일이 형법 130조를 개정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원래 계급투쟁선동죄였던 해당 조항이 소수자에 대한 증오와 비방 등을 금지하는 대중선동죄로 바뀌는 과정 말이다. ‘공공의 평화’라는 법의 목적은 여전하지만, 노동자계급 또는 공산주의자의 선동을 금지하던 법을 소수자 혐오 및 비방 선동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바꾼 것이다. 특정 소수의 선동을 금지하던 법이 특정 소수를 보호하는 쪽으로 전향적으로 바뀐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반영한 것인데, 이 변화가 나중에 제노사이드 정당화(사실 부인), 나치체제 찬양 등을 금지하는 토대가 된다. 신기한 건, 이 조항이 바뀐 시점이 1960년이라는 점이다. 독일 통일 30년 전이다. 인권과 평화에 관한 성숙한 국민 의식이 훗날 역사적인 통일의 밑거름이 된 것은 아닐까.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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