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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31 18:13 수정 : 2019.03.31 20:09

김은형
문화에디터

누벨바그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던 아녜스 바르다가 28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났다. 바르다는 20대 중반에 기존의 영화문법을 깨는 작품을 발표하며 누벨바그의 첫 기수 역할을 했지만 고다르나 트뤼포, 남편이기도 했던 자크 드미 등 남성 동료들만큼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칸영화제 명예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등 빛나는 재능과 영화사에 기여한 공을 널리 인정받았다. 지난해 비로소 그의 작품이 국내 처음으로 공식 개봉된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88살 영화감독 바르다와 33살 사진가 제이아르(JR)가 함께 프로젝트 여행을 떠나는 다큐멘터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그 영화다. 프랑스 시골을 유랑하듯 다니며 평범한(그리고 비범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초대형으로 출력해 현장 전시를 펼치는 내용이지만 구순을 목전에 둔 그의 노년이 필연적으로 영화에 녹아들 수밖에 없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고 심해진 노안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을 화면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평화로운 노년처럼 잔잔하게 흐르던 영화는 마지막에 갑자기 흔들린다. 그는 오랜 친구이자 영화적 동지인, 성격 괴팍한 고다르의 집에 찾아간다. 고다르가 좋아하는 에클레르를 사가지고 5년 만의 만남에 설레며 도착한 집은 굳게 닫혀 있다. 유리창에 바르다만이 이해할 만한 짧은 두 문장을 써놓은 걸 보면 약속을 깜빡한 건 아니다. 만나기를 거부한 거다. 바르다는 상처 입은 영혼과 복잡한 심경을 제이아르에게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왜 바르다는 이렇게 영화를 끝냈을까.

해설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노년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걸 봤다. 비노년층에게 노년은 추억을 끼니처럼 되새기며 벽에 걸린 그림을 보듯 현재를 관조하는 삶이라고 여겨지지만 기실 젊은 날과 다름없이 상처받고 엉클어지는 뜨거운 속내를 지니고 있다는 걸 바르다는 보여준다.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눈이 부시게>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준다. 타임슬립인 줄 알았다가, 이 모든 게 치매에 걸린 혜자의 시선임을 알게 된 시청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야기 전개의 어디까지가 착각이고 어디까지가 진짜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어디까지를 노년의 모습이(어야 한다)라고 착각하고 있었는가의 문제에서다. 드라마에서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25살인 혜자는 성형외과 앞에서 주춤대는 ‘샤넬’ 할머니를 병원에 끌고 들어간다. 거리에 널린 게 성형외과인데 이들의 여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노인이 성형외과를 찾는 걸 의아해하거나 노골적으로 비웃는 젊은 층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노년에 관한 에세이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에서 노년층에 대한 차별 또는 혐오의 근원을 탐색하면서 유독 노인의 몸만이 ‘자연스러움’을 낭만화하는 함정에 빠진다는 걸 꼬집는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이십대부터 다이어트, 머리 모양, 다리털 면도까지 몸의 ‘순리’를 역행하는 노력을 꾸준히 해온다. 성형도 그 일환이다. 그런데 젊은 층에게는 예뻐지려는 적극적 노력으로 이해되는 성형이 노인들에게는 시간의 흐름을 억지로 거스르려는 추태로 받아들여진다. 이건 단지 보이는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과 정서 같은 모든 몸의 기능에 걸쳐 있다. 젊은 사람이 뭔가를 잊어버리거나 실수하면 개인의 약점이라고 이해되지만 노인의 실수는 나이 때문이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노년은 성별, 인종, 취향 등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에게 다가올 미래이기 때문에 도리어 차별이 합리화되기도 한다.

최근 노년에 관한 책들이 부쩍 쏟아져 나온다. 사실 노년에 현명함, 지혜, 깨달음 등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는 것도 민망하다. 노화에는 어쩔 수 없이 슬픈 구석이 있다. 다만 노년의 상징이 지혜나 관조가 아니라는 걸 바꿔 말하면 노인도 청년처럼 뜨겁고 서럽고 아플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다. 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 4월 중순까지 아녜스 바르다 특별전을 하고 있으니 뜨겁고도 가볍고, 전위적이면서도 따스했던 그의 아흔살 예술인생을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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