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경제 에디터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하면 하나같이 대기업 현지 공장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는 이유가 뭔가요?” 업계 경험이 많은 한 공기업 사장이 몇달 전 점심 자리에서 툭 던진 말에 한동안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나라 정상이나 관행처럼 하는 ‘경제 외교’ 아니겠느냐고 눙쳤더니 “한국 외교에서 유독 심한 독특한 관행”이라고 즉각 반박했다. 수출입국 대한민국의 오랜 잔영인데, 대기업 공장의 국외이전이 큰 문제인 이젠 그만둬야 할 일이라는 게다. 엊그제 문재인 대통령이 삼성전자 공장을 방문하는 걸 보면서 그 말이 떠올랐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된 일인데…. 삼성 공장 방문은 문 대통령이 지난해부터 이어온 ‘경제 행보’의 화룡점정과 같다. 엘지의 연구개발센터를 시작으로 에스케이하이닉스의 청주 공장, 올해 초 울산 현대차에 이어 이번에 삼성을 갔으니, 1년여 만에 주요 4대 그룹 순회방문을 마친 셈이다. 정부-삼성 간 ‘비메모리 동맹’은 연초부터 잘 짜인 각본처럼 진행돼왔다. 지난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기업인 간담회에서 “비메모리는 어떻습니까?”(문 대통령) “기업은 늘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합니다”라는 문답이 그 출발점이었다. 이후 마치 약속 대련을 보는 느낌이랄까. 대통령과 여당, 삼성 쪽에서 ‘비메모리가 미래 성장동력’이라는 말을 주고받더니, 삼성의 대규모 투자 계획과 정부의 육성 전략이 잇따라 발표됐다. 정부-삼성 간 ‘반도체 밀월’은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작품이란 이야기가 들린다. 본인이 기업가이자 오랜 기간 국회 산자위에서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터라 그런 모양인데, 참모의 조언을 받을지 말지는 결국 대통령 몫이다. 대법원 판결을 앞둔 재벌 총수를 대통령이 만나는 건 부적절하다는 비판에 청와대는 억울해한다. 기업 활동과 재판은 별개라는 청와대 입장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이재용 부회장에게 미리 사면장을 주는 격이란 지적도 동의하기 힘들다. 전직 대통령의 숨은 실세를 찾아 뇌물을 줬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마당에 삼성 또한 어찌 부적절한 거래를 하겠는가. 이 부회장 재판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보수적이고 기업 친화적인 사법부의 성향이 변수라는 말이 더 설득력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대기업 순회가 그만큼의 성과를 가져다줄 것이란 청와대의 의도는 실현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재벌 중심 성장으로 회귀하고 재벌 총수한테 면죄부를 주는 것이란 지지자들의 비판과 의혹을 무릅썼지만, 자칫 목표한 성과는 얻지 못하고 정치적 상처만 남길 공산이 크다. 이 부회장이 “인천공항 건설 비용의 3배인 20조원이 들어간다”고 자랑한 곳은, 삼성이 이미 2년 전부터 짓기 시작한 비메모리 생산 공장이다. 건설 중인 공사장에 잔칫상 차려 놓고 생색을 크게 낸 모양새인데, 국내 대표기업이 국가경제를 위해 서둘러 투자에 나섰다는 해석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얘기다. 비메모리는 국내 반도체 업계의 20년 숙원 과제다. 비메모리 설계(팹리스)와 생산(파운드리) 역량이 핵심인데,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안 했다기보다는 못 했다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깝다. 삼성은 신수종 산업에서 10여년째 별다른 진전이 없자 자신의 주특기인 반도체 분야에서 ‘버전2’ 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비메모리에 10년간 130조원대 투자는 예년보다 조금 웃도는 수준인데, 투자 규모와 시기는 더 늘어나고 빨라질 수 있다. 정반대로 규모를 더 줄이고 시기 또한 늦출 수 있다. 그 기준은 비메모리 기술과 생산력, 업황에 달린 것이다. 정부가 지원하고 독려하면 투자에 나선다는 건 앞뒤가 바뀐 이야기다. 박근혜·이명박 정부 때도 기업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대통령의 일정은 그 자체가 메시지다. 기업과 노동을 갈라치는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지만, 집권 초 제일 먼저 인천공항 비정규직을 찾아가 손잡던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지금 조선·자동차 생산 단지엔 원청 물량을 받지 못해 금형을 빼앗기고 공갈죄로 고소당하는 협력업체들이 부지기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산을 빼앗는 대출 회수에 도산하는 이들도 많다. 대통령의 경제 행보가 이런 곳에 먼저 닿으면 안 되는 걸까.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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