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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21 21:36 수정 : 2006.06.09 16:17

세상읽기

경기 평택 대추리에서 주민·시위대와 경찰·군대가 대치하거나 직접 충돌하는 장면, 그리고 무너진 대추분교 잔해더미를 지켜본 사람들은 누구나 충격을 받았을 테고, 또 심란했을 터이다.

한국 사회가 여전히 그런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밖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도 심란했지만 그보다 더 심란한 것은 일부 언론이 앞장서서 정부의 강경 진압을 부추기는 현상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외부 단체의 사주가 어쩌니, 보상이 어쩌니, 폭력이 어쩌니 하는 얘기가 따라 나오지만 당사자들이 그런 주장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으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주관적 해석인지는 잘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어쨌든 이번 사태의 중심에 타의에 의해 이미 몇 차례 삶의 터전을 옮긴 일흔, 여든 되신 노인들이 있고, 그들의 바람이 여생을 그곳에서 계속 땅을 일구며 사는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던 대학 시절, 집회에서 구호를 선창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구호 자판기’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져도 구호의 마지막은 독재정권 타도였고, 학내 비리가 터져도 구호의 마지막은 독재정권 타도였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때로는 맥락 없는 구호가 참가자들의 실소를 자아내며 묘하게 집회장의 긴장을 일시 이완시키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으리라.

구호 자판기는 참가자들의 의지를 모아내려는 주최 쪽의 동기를 보여주지만 사실은 그러한 현상 자체가 강요된 상황의 산물이었다. 맨몸으로 독재정권의 구조적 폭력에 맞섰던 젊은이들에게 독재정권의 타도야말로 자신들의 주장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고리로 보였을 것이다. 또 그 당시 민주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해주는 언론 매체는 하나도 없었으며, 오히려 항상 그들을 친북 좌파요 반미주의자로 낙인찍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행위를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왜곡 선전했다. 독재정권과 언론의 행위처럼 근사한 구호 자판기는 없어 보인다.

20여년 전에 비해서 한국 사회가 훨씬 민주화하고 다양화되었다고 하는데도 대추리 사태가 안보를 위협하고 주민과 시위대는 모두 친북 좌파, 반미주의자라는 주장이 횡행하니 오월의 한복판에서 다시 한 번 안보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1961년 5월16일 새벽 한국 사회의 안보를 책임져야 할 군대의 일부가 한강 인도교를 건너서 시청 앞으로 몰려들었고, 80년 5월18일 국민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군대의 일부가 광주 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 그리고 그 두 사건이 한국 사회에 초래한 것은 민주주의와 광주 시민의 희생이었다.

이 땅에서 안보를 지켜온 사람들은 안보는 미군에게 맡기고 전선의 군대를 후방으로 빼돌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거나 무기를 보습으로 만들려는 이름 없는 민초들이었다. 그리고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소중한 안보가 어디 있을 것이며, 그들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안보 위협이 어디 있겠는가.

강경 진압을 부추기는 대신 정부가 못하면 언론과 시민단체, 정치권이라도 나서서 대추리 이장님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하는 그런 살맛 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화근의 뿌리가 미군기지 확장 이전 문제이고,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경험법칙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것 아닌가.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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