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5.25 21:49
수정 : 2006.06.0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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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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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바야흐로 재벌과 외국자본의 수난시대다. 현대차 총수가 구속되었고, 두산 총수는 재판을 받고 있고, 삼성 총수도 언제 불려갈지 전전긍긍이다. 그런가 하면 론스타의 한국대표가 조사를 받았고, 외환은행의 웨커 행장은 일주일 출근을 저지당했다. ‘세금폭탄’이 투하된 외국계 펀드도 여럿이다. 한국경제를 지배하는 듀엣의 갖가지 비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고나 할까.
사태가 이쯤 되면 “재벌이든 외자든 모두 ‘자본’이므로 악이다”는 ‘자본성악설’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본을 타도하려는 이런 관점은 “재벌이든 외자든 모두 ‘자본’이므로 선이다”는 ‘자본성선설’과 마찬가지로 시대착오적이다. 그리고 “외자는 ‘외국’ 자본이므로 재벌보다 좋다”는 외환위기 직후 풍미했던 ‘외자 우상숭배론’이나 그 반대로 “외자는 ‘외국’ 자본이므로 재벌보다 나쁘다”는 최근 부상한 ‘외자 마녀사냥론’이라는 양극단의 오류도 다를 바 없다.
재벌과 외자는 우리에게 일자리와 생산물을 제공한다. 하지만 황제경영 아래 나라를 멋대로 주무르는 재벌도 있으며, 허술한 한국경제를 공략해 부동산 투기꾼처럼 폭리를 챙기는 외자도 있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재벌과 외자의 긍정적 효과를 최대화하고 부정적 효과를 최소화하는 일이다. 재벌체제를 개혁하고 외자를 주체적 선별적으로 활용하는 게 바로 그런 길이다.
그런데 소버린파동 때처럼 재벌과 외자가 충돌하는 경우엔 어찌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난감해한다. 재벌의 행태는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알토란 같은 우리 기업을 외국에 넘겨주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식이다. 재계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낡은 재벌체제를 고수하려고 안간힘이다. 미꾸라지는 자신의 적인 메기가 옆에 있어야 긴장해서 잘 큰다는 ‘메기경영론’을 떠들다가 메기, 곧 공격적인 외자의 그림자가 겨우 보일 뿐인데도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죽을지 모르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총수의 경영권이다.
우리의 군사정권은 북괴의 남침위협을 독재의 구실로 삼았다. 그런데 그랬더니 오히려 북한을 우상숭배하는 주사파가 자라나고 남한체제가 더 흔들렸다. 그러다 사회가 민주화되자 주사파는 맥이 빠지고 북한과의 교류가 늘면서 남침위협 운운은 ‘잠꼬대’가 되었다. 재벌체제도 다를 바 없다. 외자의 위협을 빌미로 재벌체제를 고수하면 할수록 기업은 위태로워진다. 부패하고 무능한 총수 탓에 기업이 도산해 대우차처럼 결국 외자에 넘어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최근 뉴라이트가 민족주의를 짓밟고 극우 국가주의로 치달리는 한편에서 이렇게 민족주의를 악용하는 사이비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진보를 내세우는 듯한 일부 인사마저 여기에 가세한다. 총수의 세습적 경영권을 안정시켜주고 싶어 온갖 머리를 짜내고 있는 것이다. 경영권을 안정시켜주는 대신 기업에서 세금을 더 거두자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주장을 펼친다. 세금 증대는 차라리 노사관계 개혁과의 타협대상이다. 공익재단을 경영세습에 써먹게 하자는 발상은 또 무엇인가. 공익재단이 총수의 사익재단인가.
경영이 과도하게 불안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들이 외치는 식으로 경영권을 안정시키는 것은 무책임한 황제경영으로 돌아가고, 그리하여 기업과 나라경제를 망치는 사술이다. 정공법은 한국의 기관투자가, 우리사주조합 및 개인의 지분을 늘려 이들이 외자의 투기적 공격은 저지하되 부패하고 무능한 총수는 교체하는 것이다.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재벌과 외자에 엄정하고 공정한 규율을 적용하고 재벌개혁에도 박차를 더할 때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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