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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3 20:49 수정 : 2006.07.23 20:49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세상읽기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살아생전 그의 체구보다 크지 않을 자그마한 봉분을 쓰고 누워 있다. 그 흔한 비석 하나 없고, 고향집에서 삼사백 미터 떨어진 ‘옛 숲’에서 그의 무덤을 나타내주는 것은 주위의 아홉 그루 참나무뿐이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그곳에는 나무들 사이로 길게 비쳐든 한 줄기 햇빛과 누군가 봉분 위에 두고 간 빨간 장미 한 송이만이 먼 곳에서 온 이방인 참배객을 맞았다.

대영지 소유자인 그는 1850년대 후반 페테르부르크 귀족사회로부터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온 뒤 농민의 열악한 교육상태에 관심을 갖고 농민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그는 ‘농민 속으로’ 들어간 회개한 귀족 지주의 한 사람이었고, 젊은 시절부터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겪었던 정신적, 도덕적 고통을 해결할 실마리를 농부들에게서 발견했다. 이후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탁했고, 종국에는 그리스도교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러시아 문학은 사회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진지한 인생 탐구의 정신으로 한국과 일본의 근대문학 확립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톨스토이 서거 25주년이 되는 1935년 한국과 일본의 언론과 문단은 다투어 그를 기념하는 특집을 실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 문학적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사상계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인류애나 박애주의는 191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유행한 개조론, 문화주의와 무관하지 않은데 그 사상 조류의 형성에는 톨스토이도 일조했다.

이광수가 그의 예술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톨스토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자타가 공인한 ‘톨스토이안’이었다. 이광수는 그를 ‘예수 이후의 첫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예찬했고, 그의 위대성은 위대한 인류애의 공상에 있다고 단언했다. 반면 1900년대 후반 일본 유학 시절 이광수를 톨스토이로 인도한 홍명희는 그의 위대성을 이광수와 다른 측면에서 논했다. 홍명희는 그의 위대함이 기질적인 종교적 편향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리얼리즘의 성취를 보여준 데 있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이해방식은 대문호의 너른 사상적 품 때문인가, 아니면 두 사람의 문학적 지향의 차이인가.

톨스토이에 대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평가보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일본 지성계를 통한 서구 사상 수입이 한국에서 가지는 사상사적 의미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구 사상문화의 번역을 통해 근대문명을 받아들였고, 근대의 번역에서 일본은 한국 사회보다 반세기는 앞섰다. 190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선각자들이 도쿄에서 일본어로 번역한 톨스토이의 작품을 접했고, 개조론과 인류애의 정신적 원형을 경험했다. 일본 사회는 발빠른 ‘근대’의 번역으로 동북아시아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문명개화’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그들의 탈아입구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동반했고, 그것을 수단으로 해서 추구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북한 미사일 발사 직후 선제공격론을 선창하며 안보리의 북한 비난 결의안 채택에 앞장섰다. 일본 사회 일각에서 결의안 채택을 일본의 외교적 성공으로 자화자찬하는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대미 추종 외교’를 비판하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이광수는 근대를 동경한 나머지 일제 말기에는 일본의 근대를 근대의 완성으로 예찬했고,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옹호하며 ‘친일’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탈아입구 추구는 아시아에 대한 침략으로 점철되었는데, 21세기 초엽 일본은 다시 한번 탈아입구를 꿈꾸는 것일까.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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