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현지 조사를 한다고 중국 하얼빈에서 2년 가까이 머문 적이 있다. 하얼빈이 고향인 다른 학과 친구 리옌이 부모님을 소개해줬다. 미국에 남아 있는 자기 대신 나라도 제 부모를 만나 말벗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얼빈에 도착한 뒤 만난 두분의 일상은 꽤 단조로웠다. 어머니는 아침에 태극권 수련을 받고, 오후에는 이웃과 부채춤을 연습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는 오래된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는 것을 빼곤 대개 집에 머물렀다. 친절하지만 말수가 적은 이분들과 뭘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남쪽이 고향인데 어쩌다 하얼빈까지 오셨나 여쭤봐도 “나라의 발전을 위해”라며 멋쩍게 웃으시곤 한참 입을 닫으셨다. 예의를 다하겠다는 의무감으로 몇번 들른 뒤 끝날 것 같던 만남이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방문을 거듭하면서 이 어색한 침묵에 익숙해졌고, 한달에 두어차례 가졌던 만남은 하얼빈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현지 조사 과정에서 매번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니 외려 침묵이 위안이 되었다. 리옌의 부모님과 티브이를 보고, 만두를 빚고, 가끔 근처에서 외식을 했다. 나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떠올렸고, 리옌의 어머니는 문화대혁명 시절 혹한의 농촌에서 두 딸을 낳았던 시절로 되돌아갔다. 딸들에게 달리 줄 게 없어 마 뿌리를 까서 먹였더니 커서도 매운 걸 잘 먹는다며 기특해하셨다. 지금도 급한 성미에 제 발등이 찍혀 어수선할 때면 리옌 부모님과 걸었던 그 길을 떠올린다. 댁에서 버스정류장까지 잰걸음으로 오분이면 넉넉했지만, 나를 배웅하겠다고 지팡이를 짚고 나선 리옌 아버지와 삼십여분을 걸었던 길이다. 말없이 더디 걷던 그 감각을 되짚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다. 지난달 모처럼 리옌한테 이메일이 왔다. 부모님이 미국에 머물고 계시다며 최근 사진을 보내주었다. 야위셨지만 십여년 전 그때처럼 조용한 미소를 품고 계셨다. 리옌의 이메일을 확인했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한 인구문제 전문가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 이른바 ‘생산가능’ 인구에서 결혼여성의 출산율까지, 그의 자료는 ‘급감’을 외치는 지표로 가득했다. 경제학자 특유의 담담한 어투와 통계의 건조함이 그나마 청중의 불안을 다독였다. 강연이 지나고 며칠 뒤 통계청이 인구변화 예측을 발표했다. 올해부터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보다 많아지는 인구 자연감소가 시작됐다고 한다. 현재의 저출산 추세가 지속되면 향후 50년 사이에 인구가 1천만명 이상 감소할 전망이란다. 통계청 발표 직후 언론은 작정하고 위기 서사를 토해냈다. 인구 “절벽”이고 “재앙”이고 “비극”이다. “생산연령인구는 급감”하고, “고령 인구는 급증”하고, “젊은층 부양부담은 가중”된다. 연금제도 붕괴부터 ‘탈조선’ 붐까지, 인구 감소가 소비위축과 고용침체로 이어지면서 펼쳐질 디스토피아의 전망도 갖가지다. 젊은 여성은 그나마 출산기계로 ‘대접’받지만 노인은 얼른 죽어야 마땅해 보인다. 이 판국에 목숨이 붙은 노인들은 뭘 해야 하나? 쓸모로 인격을 가늠하는 사회에서 줄곧 내달려온 노인들은 국가주의, 발전주의 서사로 자신의 생애를 편집하느라 분주하다. ‘내가 전쟁에서 목숨 걸고 싸운 덕분에 공산주의로부터 이 나라를 지켰다.’ ‘내가 월남에서 피 흘린 덕분에 경부고속도로를 깔았다.’ ‘내가 소처럼 일한 덕분에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 말은 차고 넘치나 안타깝게도 들을 귀가 없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란 기대를 접은 채 일상에서 지리멸렬한 전쟁을 수행 중인 젊은이들에게 빈축을 사지 않으면 다행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태극기부대부터 은퇴한 노교수까지 자신의 공로를 몰라주는 세상에 대한 설움이 한가득이다. 제 쓸모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상대의 무관심과 버릇없음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되다 보니 세대 간 불화만 깊어지는 형국이다. 돌이켜보면 리옌의 부모님과 나의 오붓한 만남은 여유가 있어 가능했다. 각자 연금과 조사비라는 적당한 소득이 있었고, 느림의 지혜를 귀하게 여길 마음이 있었다. 지금 당장 ‘저출산’ 대책을 접으라고, 성장주의를 포기하라고 외칠 생각은 없다. 다만 인구 ‘위기’ 이전의 대한민국이 정말 서로에게 안녕했는지 반문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우리 모두 죽는다. 그 전에 늙는다. ‘어르신’ 말고 ‘노인’ 그 자체로 존경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구상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칼럼 |
[세상 읽기] 어르신 말고 노인 /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현지 조사를 한다고 중국 하얼빈에서 2년 가까이 머문 적이 있다. 하얼빈이 고향인 다른 학과 친구 리옌이 부모님을 소개해줬다. 미국에 남아 있는 자기 대신 나라도 제 부모를 만나 말벗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얼빈에 도착한 뒤 만난 두분의 일상은 꽤 단조로웠다. 어머니는 아침에 태극권 수련을 받고, 오후에는 이웃과 부채춤을 연습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는 오래된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는 것을 빼곤 대개 집에 머물렀다. 친절하지만 말수가 적은 이분들과 뭘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남쪽이 고향인데 어쩌다 하얼빈까지 오셨나 여쭤봐도 “나라의 발전을 위해”라며 멋쩍게 웃으시곤 한참 입을 닫으셨다. 예의를 다하겠다는 의무감으로 몇번 들른 뒤 끝날 것 같던 만남이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방문을 거듭하면서 이 어색한 침묵에 익숙해졌고, 한달에 두어차례 가졌던 만남은 하얼빈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현지 조사 과정에서 매번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니 외려 침묵이 위안이 되었다. 리옌의 부모님과 티브이를 보고, 만두를 빚고, 가끔 근처에서 외식을 했다. 나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떠올렸고, 리옌의 어머니는 문화대혁명 시절 혹한의 농촌에서 두 딸을 낳았던 시절로 되돌아갔다. 딸들에게 달리 줄 게 없어 마 뿌리를 까서 먹였더니 커서도 매운 걸 잘 먹는다며 기특해하셨다. 지금도 급한 성미에 제 발등이 찍혀 어수선할 때면 리옌 부모님과 걸었던 그 길을 떠올린다. 댁에서 버스정류장까지 잰걸음으로 오분이면 넉넉했지만, 나를 배웅하겠다고 지팡이를 짚고 나선 리옌 아버지와 삼십여분을 걸었던 길이다. 말없이 더디 걷던 그 감각을 되짚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다. 지난달 모처럼 리옌한테 이메일이 왔다. 부모님이 미국에 머물고 계시다며 최근 사진을 보내주었다. 야위셨지만 십여년 전 그때처럼 조용한 미소를 품고 계셨다. 리옌의 이메일을 확인했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한 인구문제 전문가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 이른바 ‘생산가능’ 인구에서 결혼여성의 출산율까지, 그의 자료는 ‘급감’을 외치는 지표로 가득했다. 경제학자 특유의 담담한 어투와 통계의 건조함이 그나마 청중의 불안을 다독였다. 강연이 지나고 며칠 뒤 통계청이 인구변화 예측을 발표했다. 올해부터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보다 많아지는 인구 자연감소가 시작됐다고 한다. 현재의 저출산 추세가 지속되면 향후 50년 사이에 인구가 1천만명 이상 감소할 전망이란다. 통계청 발표 직후 언론은 작정하고 위기 서사를 토해냈다. 인구 “절벽”이고 “재앙”이고 “비극”이다. “생산연령인구는 급감”하고, “고령 인구는 급증”하고, “젊은층 부양부담은 가중”된다. 연금제도 붕괴부터 ‘탈조선’ 붐까지, 인구 감소가 소비위축과 고용침체로 이어지면서 펼쳐질 디스토피아의 전망도 갖가지다. 젊은 여성은 그나마 출산기계로 ‘대접’받지만 노인은 얼른 죽어야 마땅해 보인다. 이 판국에 목숨이 붙은 노인들은 뭘 해야 하나? 쓸모로 인격을 가늠하는 사회에서 줄곧 내달려온 노인들은 국가주의, 발전주의 서사로 자신의 생애를 편집하느라 분주하다. ‘내가 전쟁에서 목숨 걸고 싸운 덕분에 공산주의로부터 이 나라를 지켰다.’ ‘내가 월남에서 피 흘린 덕분에 경부고속도로를 깔았다.’ ‘내가 소처럼 일한 덕분에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 말은 차고 넘치나 안타깝게도 들을 귀가 없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란 기대를 접은 채 일상에서 지리멸렬한 전쟁을 수행 중인 젊은이들에게 빈축을 사지 않으면 다행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태극기부대부터 은퇴한 노교수까지 자신의 공로를 몰라주는 세상에 대한 설움이 한가득이다. 제 쓸모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상대의 무관심과 버릇없음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되다 보니 세대 간 불화만 깊어지는 형국이다. 돌이켜보면 리옌의 부모님과 나의 오붓한 만남은 여유가 있어 가능했다. 각자 연금과 조사비라는 적당한 소득이 있었고, 느림의 지혜를 귀하게 여길 마음이 있었다. 지금 당장 ‘저출산’ 대책을 접으라고, 성장주의를 포기하라고 외칠 생각은 없다. 다만 인구 ‘위기’ 이전의 대한민국이 정말 서로에게 안녕했는지 반문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우리 모두 죽는다. 그 전에 늙는다. ‘어르신’ 말고 ‘노인’ 그 자체로 존경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구상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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