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21 18:37
수정 : 2019.04.2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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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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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죽였다. 재판을 마치고 한 생각이었다. 재판정에 선 그녀는 스무살이었다.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진 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18살이었다. 18살의 그녀가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세상은 그 사실을 지우려 들었다. 남자친구는 고개를 돌렸고 그 부모는 아들의 앞날을 망치지 말라 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와 장래에 태어날 손주를 부끄러워했다. ‘그녀의 세상’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그녀는 도망쳐 나와 홀로 열달간 아이를 품었고, 홀로 아이를 낳았다. 사회복지시설에 들어가 자신과 아이의 삶을 이어갔다.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재택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장을 보고, 아이를 먹이고, 자신도 먹고, 아이를 달래고, 자신도 울고, 아이를 재우고, 자신도 잠들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아빠를 보여줘야 한다며 두어달에 한번씩 남자친구가 그 부모와 함께 사는 집을 찾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 혼자였다.
무덥던 어느 날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장을 보고, 아이를 먹이고, 아이를 달래다가, 아이의 입을 틀어막아 죽였다. 아이의 울음이, 아이의 존재가 순간적으로 너무 힘들게 느껴졌단다. 그녀는 죽은 아이를 한참 껴안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싶었고 기르고 싶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낳았고 있는 힘을 다해 길렀다. 분명 있는 힘을 다했는데도 결국은 아이를 잃었다. 모두가 아이를 지우라고 했을 때 도망가면서까지 아이를 낳은 그녀였지만, 혼자 아이를 키우다 감당하기 힘든 고단함에 무너졌다. 영아살해죄로 재판정에 선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죄책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국가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었던 그녀를 방치했다. 둘이서도 힘든 육아를 어린 나이에 홀로 감당하게 했다. 궁지에 몰린 그녀가 아이의 숨을 막아 존재를 지우자 국가는 그녀에게만 오롯이 그 책임을 물렸다. 기소된 죄의 의미가 마치 ‘가혹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죄’처럼 느껴져 참담했다.
아이는 스스로 큰다는 말도 있지만, 아이가 실제로 어떤 도움도 없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임신·출산과 양육은 혼자서는 생존하지 못할 생명을 세상에 내놓아 온전히 책임지고 길러냄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보호와 지원 없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이 아니다. 그 책임은 남성과 사회 공동체가 함께 분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최종적인 책임을 오롯이 출산한 여성에게 전담시키는 경우가 많다. 엄마는 강하다면서. 그러나 엄마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땅 파니 돈 나오는 마법을 시전하거나 엄마 한명이 세명쯤으로 늘어나는 분신술까지 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성에게 있어 임신과 출산, 양육의 결단은 추상적인 결정이 될 수 없다.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문제, 여성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이 된다. 모체의 몸 안에서 태아의 생명과 모친인 여성의 생명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태어난 아이는 보호되며 책임져야 할 존재가 된다. 이런 점이 제대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인식에서 보면, 출산과 양육은 이를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가 신중히 판단돼야 할 여성의 전인격적 결정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그녀’처럼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어도 순식간에 궁지에 몰릴 수 있을 만큼 가혹한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등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단순히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모)의 자기결정권의 충돌·대립 관계로 사안을 규정한 후 여성의 자기결정권 보호에 손을 들어준 결정으로 보기는 어렵다. 결정문을 읽다 보면, 다수의 재판관들이 여성의 임신중단 결정을 무책임한 태도로 치부하는 대신 여성 자신과 태아의 삶 전부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여 내린 전인격적 결정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여성에게 임신·출산·육아의 최종적 책임을 전담시키면서 동시에 감당할 수 있든 없든 그 가혹한 삶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강제하는 폭력에 대하여, 사법이 더 이상은 안 된다며 문을 닫은 것이다. 사법은 그래야 한다. 사람의 기본권과 존엄을 보장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형성하는 역할, 즉 문을 여는 역할을 하진 못하지만 최소한 기본권과 존엄이 침해되지 않도록 문을 제대로 닫을 수는 있어야 한다.
2019년 4월11일, 여성들에게 사법이 존재했다.
류영재
춘천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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