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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9 16:50 수정 : 2019.05.09 19:11

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한 기업인 출신이 대통령이 됐다. 능력과 성과 위주의 객관적인 인사가 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달랐다. 의문을 제기했을 때 한 전직 금융사 임원이 말했다. “당신이 기업을 아는가?”

3년 전 ㄱ경제연구소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업의 인권 존중 관련 최근 국제 동향과 기업의 개선점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수백명의 연구원을 거느리고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 연구소에서 그 정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초청에 응했다. 유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몇몇 국가에서의 논의를 개관하고 직접 개입했던 몇몇 해외진출 한국 기업의 인권침해 사례를 소개했다. 가장 핵심적인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가 마지막 질문이었다. “국제기준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상식적인 수준에만 도달해도 된다.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고 정경유착으로 점철된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수준만 극복해도 된다.” 얼마 후 관련 기업의 부회장은 뇌물죄로 구속기소됐고 그 연구소는 노조 와해 전략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2년 전 ㄴ사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담당자로부터 ‘이해관계자’ 자문회의 참석을 요청받았다. ㄴ사는 상대적으로 시에스아르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이해관계자’ 대부분은 정부 관계자, 사업상 관련이 있는 듯한 교수, ㄴ사의 후원을 받는 단체 관계자였다. 자문 요청의 대상도 ㄴ사의 지속가능경영전략의 중장기 목표, 추진방안 등 사실상 일반적인 경영자문에 관한 것이었고 심지어 경영전략의 표현방식 등 홍보와 관련된 것도 있었다. 노동자, 주민, 소비자 등이 빠진 그 자리가 원래 의미의 ‘이해관계자’ 모임일 수는 없었다. 계열사의 가습기살균제 피해, 공급업체 노동자들의 메탄올 중독 문제, 해외진출 부문의 과도한 사내하청, 연장근로의 문제 등이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는 전략과 목표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ㄴ사가 이제는 ‘이해관계자’를 이해하고 그 이해에 걸맞은 회의 등을 진행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1년 전 가습기살균제와 관련이 있는 ㄷ사 자문변호사가 찾아와 회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모든 진실을 밝히고 그에 상응하는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및 배상, 재발방지대책 수립 등의 조치를 선제적으로 하는 것이 기업이 사는 길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ㄷ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관련 물질에 대한 검사를 안 했을 리 없고 문제가 없었다면 대대적으로 알렸을 텐데 밝히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냐는 얘기도 했다. 최근 그 회사가 자체 검사를 한 사실, 검사 결과를 은폐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 회사는 참사의 책임에 대해서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정부는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수립 시 ‘기업과 인권’과 관련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인 인권실천 및 점검 의무(HRDD) 실천계획을 명시적으로 선언할 것을 거부했다. 공공기관의 인권경영에 관한 국가인권위원회 권고가 있은 후 경영평가 점수를 채우기 위해 988개 공공기관이 관련 위원회를 급조하고 있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실질적인 변화는 요원하다. 오이시디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에 입각한 진정절차를 담당하는 정부 주도의 국내연락사무소(NCP)는 단 한 번도 피해자 인권의 관점에서 사례를 다뤄본 경험이 없다. 국민연금 정도 규모의 공적 연기금 중 국민연금처럼 투자에서 제대로 된 인권기준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는 없다.

나는 기업을 잘 모른다. 하지만 소위 최순실 사태로 드러난 정권과 대기업들의 추악한 민낯이 단지 과거지사가 아님은 안다.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을 행태에 침묵하며 그 떡고물을 즐겼던 이들이 일말의 반성 없이 ‘경제파탄’ 우려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꼴불견인지도 잘 안다. 규제완화를 몰아붙이고 대기업의 역량 강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인권에 역행할 위험성이 높은지도 안다. 전근대적인 기업의 행태가 이어지고, 이를 방치 혹은 조장하는 권력의 모습이 계속되면 힘없는 이들의 인권 침해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병상에 누워 있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개발사업으로 난민촌으로 쫓겨온 미얀마 소녀, 사장이 야반도주한 공장으로 매일 향하는 인도네시아 노동자, 댐 붕괴로 가족과 집을 잃어버린 라오스 주민의 얼굴에 비친 한국 기업을 더는 볼 수 없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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