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마크 트웨인은 100명 남짓 사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탄생으로 마을 인구가 1% 늘었는데, 이게 자기 아버지가 해낸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만큼 긴 자서전에서 이런 ‘진상발언’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전부다. 자신의 눈앞에서 노예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그는 아버지를 지우고 어머니에게 기대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없었다. 어머니와 결혼하고 서둘러 군대에 가 있었다. 영어 한마디도 못 했던 아버지는 어찌어찌하여 카투사 부대에 배치되었다. 내가 시커먼 아궁이 속으로 기어들고 갑자기 불어난 도랑물에 떠내려갈 때, 아버지는 빵과 ‘빠다’와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비 없는’ 아들을 때깔 좋은 옷을 입혀 사진관을 찾았다. 사진만 보면 어엿한 부잣집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고집과 수완이 대단했다. 군대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외항선원이 되어 바다로 떠났다. 조금이라도 자주 보려고, 가족은 항구 옆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쯤 돌아와서는 곧 가버렸다. 내가 학교 시화전에 처음 출품한 시는 ‘수출역군’ 아버지가 ‘땡그랑’ 문소리를 내며 집에 들어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 대문 위에는 조그만 싸구려 종 하나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가 ‘손님’이 된 집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시골 친척들이 불쑥 찾아와 기약 없이 머물던 숙소였고, 도시 진출의 베이스캠프였다. 어머니는 외롭게 큰 살림을 꾸렸다. 내 도시락에는 늘 달걀 프라이가 있었다. 어차피 주판셈으로는 불가능한 살림이었다. 아버지의 월급은 안정적이었지만 뻔했다. 어머니의 서러운 노력이 보태져야 굴러가는 살림이었다. 대책 없이 ‘큰’ 살림은 어머니가 처한 궁박한 역경이자 당신의 자부심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은 내가 방학 때마다 호기 좋게 그려대던 생활계획표일 수는 없었다. 나는 방학 때마다 계획하고 실패했지만, 당신들은 계획조차 불가능했다. 어쭙잖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따지는 일은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위선스러운 여유 같았다. 그는 온갖 부와 권력을 다 누린 뒤에 금욕과 금기의 삶에 대해 설파했다. 나의 어린 눈에 비친 세상은 그저 발각되고 처벌되느냐의 문제만 있었다. 항구를 통해 실려온 크고 작은 가방들이 집을 거쳐서 부산 깡통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아들이 법관이 되길 바란다는 부모의 바람을 살짝 전해주고 갔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평생 일했던 아버지는 바다에서 아슬한 사고를 겪고 나서야 돌아왔다. 가족으로의 복귀였으나 그때 아들은 이미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난 뒤였다. 살가운 정이라고는 없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본론> 영문판을 일본에서 구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라도 말의 길을 터준 아들이 고마워서 아버지는 천신만고 끝에 책을 구해서 전했다. 아들은 책만 챙겨 들고 서울로 떠났다. 어머니는 말없이 차비만 챙겨주었다. 바다를 떠난 아버지는 육상의 ‘파도’와 싸워야 했다. 이젠 혼자가 아닌데도 어머니의 생활전선도 쉽지 않았다. 경계가 애매했던 일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나는 법대를 가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 내게는 고귀한 환상이었다면, 부모의 ‘살림 투쟁’은 손쓸 수 없는 무거운 현실이었다. 지금은 누구도 그때를 얘기하지 않는다.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 탐탁지 않지만, 세네카의 이 말만은 진실하다. 땅에 살면서 멀미를 달고 살았던 두분은 타락한 정치인에게 관대하다. 천하의 파렴치한 자들이 ‘국익’을 명분으로 벌인 일에 세상이 분노할 때, 두분은 짧게 화낸다. 그러면서 그럴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꼭 보태고야 만다. 내 부모 속에서 ‘어버이 연합’의 그림자를 보고 나는 언성을 높이면서도 늘 마음 한쪽은 짠하다. 아들은 서둘러 티브이 화면만 바라본다. 얼마 전 어버이날이었다. 동생들은 오만원짜리 지폐가 선명하게 꽂힌 선물을 두분께 안겼다. 더 이상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삶이 싫으신지 노골적으로 선명한 용돈박스를 받고 함박 웃으신다. 얼굴이 카네이션처럼 붉고 환하다. 바쁘다는 전매특허 핑계로 아들은 이번에도 시간 맞춰 전화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도 아닌 나는 찌질한 마음만 이렇게 적어둔다.
칼럼 |
[세상 읽기] 어버이날에 돌아보다 /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마크 트웨인은 100명 남짓 사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탄생으로 마을 인구가 1% 늘었는데, 이게 자기 아버지가 해낸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만큼 긴 자서전에서 이런 ‘진상발언’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전부다. 자신의 눈앞에서 노예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그는 아버지를 지우고 어머니에게 기대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없었다. 어머니와 결혼하고 서둘러 군대에 가 있었다. 영어 한마디도 못 했던 아버지는 어찌어찌하여 카투사 부대에 배치되었다. 내가 시커먼 아궁이 속으로 기어들고 갑자기 불어난 도랑물에 떠내려갈 때, 아버지는 빵과 ‘빠다’와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비 없는’ 아들을 때깔 좋은 옷을 입혀 사진관을 찾았다. 사진만 보면 어엿한 부잣집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고집과 수완이 대단했다. 군대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외항선원이 되어 바다로 떠났다. 조금이라도 자주 보려고, 가족은 항구 옆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쯤 돌아와서는 곧 가버렸다. 내가 학교 시화전에 처음 출품한 시는 ‘수출역군’ 아버지가 ‘땡그랑’ 문소리를 내며 집에 들어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 대문 위에는 조그만 싸구려 종 하나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가 ‘손님’이 된 집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시골 친척들이 불쑥 찾아와 기약 없이 머물던 숙소였고, 도시 진출의 베이스캠프였다. 어머니는 외롭게 큰 살림을 꾸렸다. 내 도시락에는 늘 달걀 프라이가 있었다. 어차피 주판셈으로는 불가능한 살림이었다. 아버지의 월급은 안정적이었지만 뻔했다. 어머니의 서러운 노력이 보태져야 굴러가는 살림이었다. 대책 없이 ‘큰’ 살림은 어머니가 처한 궁박한 역경이자 당신의 자부심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은 내가 방학 때마다 호기 좋게 그려대던 생활계획표일 수는 없었다. 나는 방학 때마다 계획하고 실패했지만, 당신들은 계획조차 불가능했다. 어쭙잖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따지는 일은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위선스러운 여유 같았다. 그는 온갖 부와 권력을 다 누린 뒤에 금욕과 금기의 삶에 대해 설파했다. 나의 어린 눈에 비친 세상은 그저 발각되고 처벌되느냐의 문제만 있었다. 항구를 통해 실려온 크고 작은 가방들이 집을 거쳐서 부산 깡통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아들이 법관이 되길 바란다는 부모의 바람을 살짝 전해주고 갔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평생 일했던 아버지는 바다에서 아슬한 사고를 겪고 나서야 돌아왔다. 가족으로의 복귀였으나 그때 아들은 이미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난 뒤였다. 살가운 정이라고는 없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본론> 영문판을 일본에서 구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라도 말의 길을 터준 아들이 고마워서 아버지는 천신만고 끝에 책을 구해서 전했다. 아들은 책만 챙겨 들고 서울로 떠났다. 어머니는 말없이 차비만 챙겨주었다. 바다를 떠난 아버지는 육상의 ‘파도’와 싸워야 했다. 이젠 혼자가 아닌데도 어머니의 생활전선도 쉽지 않았다. 경계가 애매했던 일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나는 법대를 가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 내게는 고귀한 환상이었다면, 부모의 ‘살림 투쟁’은 손쓸 수 없는 무거운 현실이었다. 지금은 누구도 그때를 얘기하지 않는다.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 탐탁지 않지만, 세네카의 이 말만은 진실하다. 땅에 살면서 멀미를 달고 살았던 두분은 타락한 정치인에게 관대하다. 천하의 파렴치한 자들이 ‘국익’을 명분으로 벌인 일에 세상이 분노할 때, 두분은 짧게 화낸다. 그러면서 그럴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꼭 보태고야 만다. 내 부모 속에서 ‘어버이 연합’의 그림자를 보고 나는 언성을 높이면서도 늘 마음 한쪽은 짠하다. 아들은 서둘러 티브이 화면만 바라본다. 얼마 전 어버이날이었다. 동생들은 오만원짜리 지폐가 선명하게 꽂힌 선물을 두분께 안겼다. 더 이상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삶이 싫으신지 노골적으로 선명한 용돈박스를 받고 함박 웃으신다. 얼굴이 카네이션처럼 붉고 환하다. 바쁘다는 전매특허 핑계로 아들은 이번에도 시간 맞춰 전화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도 아닌 나는 찌질한 마음만 이렇게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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