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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24 18:09 수정 : 2019.07.25 13:59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1989년 경기도 용인군 농민들은 가구당 평균 5320원의 의료보험료가 새해 들어 68.4%나 오르자 의료보험 거부운동에 돌입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의료보험증을 불사르기도 했다. 그런 다사다난한 역사와 함께 올해로 전 국민 건강보험 30주년을 맞았다. 돌아보건대 우리나라 건강보험 제도에는 두가지 역사가 있었다.

첫번째 역사는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동시에 정권의 정당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만들어낸 역사다. 비스마르크가 그랬고, 쿠데타를 통해 성립된 제2공화국도 그랬다. 1975년 의료보험 실시를 건의했다는 신현확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남북 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국민생활을 ‘적절히’ 개선해줄 필요가 있다”는 말로 권력자를 설득했다고 한다. 두번째 역사는 이른바 ‘두레’ ‘계’ 등으로 상징되는 오래된 상부상조의 전통이다. 조선인들의 건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던 일제 강점 때조차 노동자, 농민은 스스로 자신의 질병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양한 노력을 경주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28년 ‘원산노동연합회’가 만든 원산노동병원이다.

1988~89년에 걸쳐 농민들이 의료보험증을 불살랐던 사건은 정권의 안위와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해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의료보험료를 내라고 했던 ‘첫번째 역사’를 거부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스스로 자신들의 의료보장제도를 만들려는 ‘두번째 역사’의 실천이었다. 그 뒤 농민들은 공화당사를 점령함으로써 의료보험 통합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이렇게 시작한 시민·노동사회의 연대는 2000년 마침내 지금의 통합의료보험체계를 만들었다. 수백개로 나뉘어 있었던 조합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다면 가난한 조합과 부자 조합 간 격차 문제, 의료보장 확대의 어려움 등 때문에 건강보험 제도는 사회안전망으로서의 기능을 지금 정도로 담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전 국민 건강보험이 이루어낸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수치가 보여주는 평가는 실로 부끄럽다. 여전히 보장률이 60% 수준으로,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80%에 크게 못 미치는 ‘반쪽짜리 건강보험’이다. 이로 인해 10%에 달하는 의료 미충족률과 4%에 달하는 재난적 의료비 지출 가구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보험료 미납 등으로 의료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400만명의 문제를 더하면, ‘전 국민 건강보험’이라는 표현이 무색해진다.

지난 2일 전 국민 건강보험 시행 3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에 전체적인 보장률을 70%까지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낮다. 이미 의료비 증가 속도가 오이시디 회원국 평균의 5배에 이르는 상황에서, 정부가 발 벗고 의료영리화 조치를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고 있고, 이들 조치가 실효화될 경우 국민건강보험 재정은 급격히 악화될 것이다. 반면 지속가능한 건강보장체계 구축을 위해 꼭 필요한 지불제도 개편, 일차의료 중심의 의료서비스 제공체계 구축, 공공보건의료부문의 질적·양적 강화 등의 구조적 전환 작업은 시작조차 못 하고 있다. 더욱이 보험료 인상 등은 국민의 동의와 지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솔선수범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의료보험 통합 당시 정부가 약속했던 국고 지원은 1992년 36.1%를 기록한 뒤 2018년 현재 13%까지 떨어졌다. 일본의 46%, 대만의 33%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치다. 현재처럼 의료비 증가의 모든 위험을 전적으로 국민이 떠안는 상황에서 의료보장성 강화는 불가능하다. 우선 정부의 국고 지원 비율을 30%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아울러 국민건강보험 거버넌스의 전면 개혁이 필요하다. 보건복지부 산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등을 국민이 실질적인 주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편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건강보험 기금을 (영리) 바이오 헬스 산업에 투자하겠다”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의 발언 같은 것이 나오지 않는다.

전 국민 건강보험 30주년을 맞는 해, 건강보장 쟁취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국민건강보험이 모든 국민이 주인 되는 견고한 사회안전망으로 자리잡게 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의료보험증을 불사르고 정당을 점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1989년 농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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