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14억 사람들이 살아가는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선거를 통해 민의를 수렴하기보다 당이 영도하는 수직적 의사결정구도를 고집하다 보니 통치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된다. 극심한 빈부격차에서 미국과의 무역전쟁까지 나라 안팎이 들썩이다 보니 ‘안정유지’(維穩) 자체가 국정목표가 된 지 오래다. 인터넷 통제와 일상의 감시, 체제 선전 등 인민의 시선을 가리거나 한곳에 붙들어 매는 데 천문학적인 재정이 투입된다. 시선의 정치는 공산당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자유로운 공론장이 위축되고, 법치와 인치가 뒤섞인 행정이 대개 기득권층의 이익만 대변하다 보니 공적 해결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시선의 권력을 활용한다. 부패한 관리를 응징하기 위해 한국의 ‘신상털기’와 흡사한 ‘인육수색’(人肉搜索)에 가담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관공서 앞에서 읍소하는 식으로 군중을 끌어모은다. 선을 넘으면 화를 자초하지만, ‘안정유지’가 지방정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된 이상 공무원들과의 ‘밀당’은 의외의 수확을 남기기도 한다. 4년 전 선전(심천)에서 현지조사를 하던 때, 폭스콘 공장에서 일하던 19살 여성이 숙사에서 자다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여공의 어머니는 지역 관공서 앞에서 사흘 밤낮을 울다 피를 토하고 기절하기까지 했다. 약간의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려는 폭스콘에 분노한 가족들은 공장 앞으로 달려가 하염없이 울었다.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지만 관공서와 공장을 드나드는 시선의 압력이 거세지자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폭스콘이 애초 주장했던 1만위안의 위로금이 정부의 중재를 거치면서 25만위안의 배상금으로 바뀌었다. 시선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한 사건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승리로 회자되기도 하지만,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법과 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결정은 분노와 원망을 부채질하기 일쑤다. 시선의 정치가 감성의 정치와 결합하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평가와 응징은 때로 속도전을 방불케 한다. 사이버 공간의 ‘인육수색’으로 억울한 가해자로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례도 허다하다. 온몸으로 맞선 어머니 덕분에 여공의 죽음은 과로사로 인정받았지만, 이런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공장 환경과 제도를 바꾸어내려는 노동자들의 집단 저항은 극심한 탄압을 버텨내는 중이다. 흥미로운 것은 ‘민주주의’를 제 나라의 브랜드로 만든 대한민국에서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표심을 좇는 정치인과 자극적인 소재에 목마른 언론, 인터넷을 분노의 배설구로 삼는 대중이 삼각편대를 이룬 한국의 시선 정치는 중국보다 오히려 더 소란스럽다. 촌철살인의 공방이 수시로 펼쳐지는 에스엔에스(SNS) 링 위에서 각자는 모두 정의감을 불사르지만, 시선의 폭력에 노출되어도 무방하다 생각하는 적절한 먹잇감을 찾아 집단적인 한풀이를 하는 모양새다. 수사 과정의 미비를 지적하는 것은 온당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국민이 날마다 고유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접할 필요가 있나? 언론은 일본 제품 불매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대신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이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 정교하게 분석해줄 순 없을까? 왜 여당은 외부의 적을 향해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과거 보수정당의 행태를 안일하게 답습하려고 하나? 시선의 정치가 거둔 성과를 완전히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외면한 빈곤이란 주제로 대중의 시선이 향하도록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던 사례도 있다. 서울 도심에서 지하철을 이용한 사람들이라면 2012년 8월12일부터 1831일간 광화문 지하 역사에서 진행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농성을 기억할 것이다. 농성 텐트를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사람의 몸과 삶을 등급화하는 제도 때문에 죽음을 택한 빈자들의 영정에서 시선을 거두기가 괴로웠다. 정부로부터 폐지 약속을 받아내기까지, 활동가들이 나 같은 행인들을 붙잡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끈기 있게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임시방편으로 타인의 시선을 조종하는 대신 끈질기게 편향된 시선을 탈환하고 시야를 확장해내는 것, 그리하여 한 개인이나 집단을 응징하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 이런 시선의 정치는 확실히 품이 많이 든다.
칼럼 |
[세상읽기] 시선의 정치 /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14억 사람들이 살아가는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선거를 통해 민의를 수렴하기보다 당이 영도하는 수직적 의사결정구도를 고집하다 보니 통치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된다. 극심한 빈부격차에서 미국과의 무역전쟁까지 나라 안팎이 들썩이다 보니 ‘안정유지’(維穩) 자체가 국정목표가 된 지 오래다. 인터넷 통제와 일상의 감시, 체제 선전 등 인민의 시선을 가리거나 한곳에 붙들어 매는 데 천문학적인 재정이 투입된다. 시선의 정치는 공산당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자유로운 공론장이 위축되고, 법치와 인치가 뒤섞인 행정이 대개 기득권층의 이익만 대변하다 보니 공적 해결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시선의 권력을 활용한다. 부패한 관리를 응징하기 위해 한국의 ‘신상털기’와 흡사한 ‘인육수색’(人肉搜索)에 가담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관공서 앞에서 읍소하는 식으로 군중을 끌어모은다. 선을 넘으면 화를 자초하지만, ‘안정유지’가 지방정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된 이상 공무원들과의 ‘밀당’은 의외의 수확을 남기기도 한다. 4년 전 선전(심천)에서 현지조사를 하던 때, 폭스콘 공장에서 일하던 19살 여성이 숙사에서 자다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여공의 어머니는 지역 관공서 앞에서 사흘 밤낮을 울다 피를 토하고 기절하기까지 했다. 약간의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려는 폭스콘에 분노한 가족들은 공장 앞으로 달려가 하염없이 울었다.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지만 관공서와 공장을 드나드는 시선의 압력이 거세지자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폭스콘이 애초 주장했던 1만위안의 위로금이 정부의 중재를 거치면서 25만위안의 배상금으로 바뀌었다. 시선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한 사건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승리로 회자되기도 하지만,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법과 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결정은 분노와 원망을 부채질하기 일쑤다. 시선의 정치가 감성의 정치와 결합하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평가와 응징은 때로 속도전을 방불케 한다. 사이버 공간의 ‘인육수색’으로 억울한 가해자로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례도 허다하다. 온몸으로 맞선 어머니 덕분에 여공의 죽음은 과로사로 인정받았지만, 이런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공장 환경과 제도를 바꾸어내려는 노동자들의 집단 저항은 극심한 탄압을 버텨내는 중이다. 흥미로운 것은 ‘민주주의’를 제 나라의 브랜드로 만든 대한민국에서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표심을 좇는 정치인과 자극적인 소재에 목마른 언론, 인터넷을 분노의 배설구로 삼는 대중이 삼각편대를 이룬 한국의 시선 정치는 중국보다 오히려 더 소란스럽다. 촌철살인의 공방이 수시로 펼쳐지는 에스엔에스(SNS) 링 위에서 각자는 모두 정의감을 불사르지만, 시선의 폭력에 노출되어도 무방하다 생각하는 적절한 먹잇감을 찾아 집단적인 한풀이를 하는 모양새다. 수사 과정의 미비를 지적하는 것은 온당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국민이 날마다 고유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접할 필요가 있나? 언론은 일본 제품 불매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대신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이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 정교하게 분석해줄 순 없을까? 왜 여당은 외부의 적을 향해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과거 보수정당의 행태를 안일하게 답습하려고 하나? 시선의 정치가 거둔 성과를 완전히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외면한 빈곤이란 주제로 대중의 시선이 향하도록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던 사례도 있다. 서울 도심에서 지하철을 이용한 사람들이라면 2012년 8월12일부터 1831일간 광화문 지하 역사에서 진행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농성을 기억할 것이다. 농성 텐트를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사람의 몸과 삶을 등급화하는 제도 때문에 죽음을 택한 빈자들의 영정에서 시선을 거두기가 괴로웠다. 정부로부터 폐지 약속을 받아내기까지, 활동가들이 나 같은 행인들을 붙잡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끈기 있게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임시방편으로 타인의 시선을 조종하는 대신 끈질기게 편향된 시선을 탈환하고 시야를 확장해내는 것, 그리하여 한 개인이나 집단을 응징하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 이런 시선의 정치는 확실히 품이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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