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당시 내 사정으로는 나름 고가의 컴퓨터를 큰맘 먹고 장만했다. 유학생의 변변찮은 살림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내 소망은 이랬다. “비싼 컴퓨터가 좋은 논문을 빠르게 써줄 거야.” 유학 와서 5년 정도 지났지만 그 끝은 아득했고 결실도 없이 귀환할 수도 있겠다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고가의 장비가 답답한 상황을 돌파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었지만 아뿔싸, 문제는 장비가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컴퓨터 구입 이전의 체류 기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글을 쓴다는 건 큰 도전이다. 글쓰기 책이 이미 많음에도 많은 관련 도서가 여전히 출판되는 이유가 그에 있으리라. 어려운 일을 앞에 두었을 때 유능한 선배의 등을 좇는 것이 도움이 된다. 유명 작가나 저명한 연구자들은 그리도 어려운 일을 어떻게 척척 해내는 것일까?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의식이나 의례를 치르는 듯하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한다. 서재나 연구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전화기 코드를 뽑고 휴대폰의 전원을 끄거나 무음으로 한 후에 컴퓨터를 켠다. 차나 커피와 같은 음료를 준비하는 걸 잊으면 안 된다. 화장실도 다녀오는 게 좋다. 모든 것이 준비되면 이제 시작이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자. 컴퓨터 대신에 문방구를 사용하는 이들, 줄여서 문구인 선배도 적지 않다. 나도 문구인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문구인이 행하는 글쓰기 의식은 조금 더 엄격하다. 이를테면, 컴퓨터를 켜는 대신에(동시에) 오늘 사용할 연필 몇 자루를 정성들여 깎고 그에 어울리는 노트를 편다. 더 까다로운 사람도 있다. 연필을 깎는 방식을 고민한다. 주머니칼이나 전동식 연필깎이, 휴대용이나 회전식 연필깎이?(데이비드 리스, <연필 깎기의 정석>) 연필심의 길이도 중요하다. 굵고 뭉툭하게 혹은 길고 얇게? 편리성을 생각하면 연필보다 볼펜이 좋다. 볼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잉크다. 유성, 수성, 중성 잉크. 필기감과 발색을 생각하면 그래도 수성이다. 그런데 물이나 커피를 쏟으면 알아볼 수 없고 시간이 지나면 번지기도 한다. 유성 볼펜이 나으려나. 하지만 필기감이나 발색 그리고 배설물(볼펜똥)이 아쉽다. 중성 잉크는 수성과 유성의 강점을 모아놓은 혁신이다. 배설물도 적고 보존 기한, 색감, 필기감 모두 만족스럽다. 여러 색의 볼펜을 하나로 집약한 멀티펜을 고려하면, 역시 볼펜이 대세인가. 그래도 필기감은 만년필이지. 얇은 펜촉은 낭창낭창 느낌을 주고, 굵은 펜촉은 박력이 넘친다. 물론 약점도 많다. 잊지 말고 뚜껑을 닫아야 하며 손이 쉽게 더러워지고 관리가 번거롭다. 오래 방치한 만년필은 잉크가 말라붙기에 성의껏 세척해야 한다. 만약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최악이다. 그러나 만년필의 쾌감은 역시 소리와 진동이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내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는 듯싶은 느낌을 준다. 미세한 진동은 또 어떤가. 내 글이 깨어나는 건가. 소리와 진동을 온전히 느끼려면 그에 어울리는 공책이 필요하다. 공책의 선택도 쉽지 않다. 종이의 색과 질, 제본 방식(실 제본·양장 제본·스프링 제본·바인더), 선의 종류(무선·유선·괘선·도트), 그리고 크기를 고려해야 한다. 필기구와의 궁합을 생각하면 종이의 질에 신경을 써야 한다. 체계적인 관리와 보관을 원한다면 바인더 양식이나 양장 제본이 좋다. 원대한 작업을 꿈꾼다면 A3 사이즈의 공책을, 즉각적인 기록을 중시하면 수첩이 필요하다. 중요한 필기구가 빠졌다. 샤프펜슬이다. 그 종류가 또 얼마나 많은지. 심의 두께도 다양하지만(0.1~5.6㎜) 기능도 엄청나다. 샤프펜슬 스스로 적절한 길이를 자동으로 조절해주거나, 끝까지 쓸 수 있어서 버리는 샤프심이 없게 하거나, 자동 회전이나 완충 장치를 통해 잘 부러지지 않는 제품이 있다. 그런데 잠깐, 샤프펜슬은 보통명사가 아니다. 일본의 한 회사가 만든 기계식 연필(mechanical pencil)의 상품명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수집한 문구의 반 이상이 일본 제품이다. 불편하고 꺼림칙하다. 당분간 내 문구 창고의 문을 닫아야겠다. 일본 제품이 아니면 안 사겠다는 게 아니라 이미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옛 깨달음을 다시금 들추면서 은근한 걱정(글이 안 써지면 어떡하지)을 떨쳐야겠다. 그래, 문제는 장비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
칼럼 |
[세상읽기] 문구인(文具人)과 불매운동 / 전상진 |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당시 내 사정으로는 나름 고가의 컴퓨터를 큰맘 먹고 장만했다. 유학생의 변변찮은 살림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내 소망은 이랬다. “비싼 컴퓨터가 좋은 논문을 빠르게 써줄 거야.” 유학 와서 5년 정도 지났지만 그 끝은 아득했고 결실도 없이 귀환할 수도 있겠다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고가의 장비가 답답한 상황을 돌파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었지만 아뿔싸, 문제는 장비가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컴퓨터 구입 이전의 체류 기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글을 쓴다는 건 큰 도전이다. 글쓰기 책이 이미 많음에도 많은 관련 도서가 여전히 출판되는 이유가 그에 있으리라. 어려운 일을 앞에 두었을 때 유능한 선배의 등을 좇는 것이 도움이 된다. 유명 작가나 저명한 연구자들은 그리도 어려운 일을 어떻게 척척 해내는 것일까?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의식이나 의례를 치르는 듯하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한다. 서재나 연구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전화기 코드를 뽑고 휴대폰의 전원을 끄거나 무음으로 한 후에 컴퓨터를 켠다. 차나 커피와 같은 음료를 준비하는 걸 잊으면 안 된다. 화장실도 다녀오는 게 좋다. 모든 것이 준비되면 이제 시작이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자. 컴퓨터 대신에 문방구를 사용하는 이들, 줄여서 문구인 선배도 적지 않다. 나도 문구인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문구인이 행하는 글쓰기 의식은 조금 더 엄격하다. 이를테면, 컴퓨터를 켜는 대신에(동시에) 오늘 사용할 연필 몇 자루를 정성들여 깎고 그에 어울리는 노트를 편다. 더 까다로운 사람도 있다. 연필을 깎는 방식을 고민한다. 주머니칼이나 전동식 연필깎이, 휴대용이나 회전식 연필깎이?(데이비드 리스, <연필 깎기의 정석>) 연필심의 길이도 중요하다. 굵고 뭉툭하게 혹은 길고 얇게? 편리성을 생각하면 연필보다 볼펜이 좋다. 볼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잉크다. 유성, 수성, 중성 잉크. 필기감과 발색을 생각하면 그래도 수성이다. 그런데 물이나 커피를 쏟으면 알아볼 수 없고 시간이 지나면 번지기도 한다. 유성 볼펜이 나으려나. 하지만 필기감이나 발색 그리고 배설물(볼펜똥)이 아쉽다. 중성 잉크는 수성과 유성의 강점을 모아놓은 혁신이다. 배설물도 적고 보존 기한, 색감, 필기감 모두 만족스럽다. 여러 색의 볼펜을 하나로 집약한 멀티펜을 고려하면, 역시 볼펜이 대세인가. 그래도 필기감은 만년필이지. 얇은 펜촉은 낭창낭창 느낌을 주고, 굵은 펜촉은 박력이 넘친다. 물론 약점도 많다. 잊지 말고 뚜껑을 닫아야 하며 손이 쉽게 더러워지고 관리가 번거롭다. 오래 방치한 만년필은 잉크가 말라붙기에 성의껏 세척해야 한다. 만약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최악이다. 그러나 만년필의 쾌감은 역시 소리와 진동이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내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는 듯싶은 느낌을 준다. 미세한 진동은 또 어떤가. 내 글이 깨어나는 건가. 소리와 진동을 온전히 느끼려면 그에 어울리는 공책이 필요하다. 공책의 선택도 쉽지 않다. 종이의 색과 질, 제본 방식(실 제본·양장 제본·스프링 제본·바인더), 선의 종류(무선·유선·괘선·도트), 그리고 크기를 고려해야 한다. 필기구와의 궁합을 생각하면 종이의 질에 신경을 써야 한다. 체계적인 관리와 보관을 원한다면 바인더 양식이나 양장 제본이 좋다. 원대한 작업을 꿈꾼다면 A3 사이즈의 공책을, 즉각적인 기록을 중시하면 수첩이 필요하다. 중요한 필기구가 빠졌다. 샤프펜슬이다. 그 종류가 또 얼마나 많은지. 심의 두께도 다양하지만(0.1~5.6㎜) 기능도 엄청나다. 샤프펜슬 스스로 적절한 길이를 자동으로 조절해주거나, 끝까지 쓸 수 있어서 버리는 샤프심이 없게 하거나, 자동 회전이나 완충 장치를 통해 잘 부러지지 않는 제품이 있다. 그런데 잠깐, 샤프펜슬은 보통명사가 아니다. 일본의 한 회사가 만든 기계식 연필(mechanical pencil)의 상품명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수집한 문구의 반 이상이 일본 제품이다. 불편하고 꺼림칙하다. 당분간 내 문구 창고의 문을 닫아야겠다. 일본 제품이 아니면 안 사겠다는 게 아니라 이미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옛 깨달음을 다시금 들추면서 은근한 걱정(글이 안 써지면 어떡하지)을 떨쳐야겠다. 그래, 문제는 장비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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