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 연구자 한달 전 밤 열시쯤의 일이다. 편의점 앞 현금인출기를 이용하려던 참이었다. 편의점 앞 탁자에 중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여자 청소년이 혼자 휴대폰을 보며 앉아 있었고, 일행은 편의점 안에서 먹을 것을 사고 있는 듯했다. 옆 탁자에선 중년의 남성 두 사람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남성 중 한명이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저씨들이 맛있는 거 사줄까?” 침묵이 흘렀다. “말을 걸었는데 대답을 안 하네?” 쌔한 느낌의 침묵이 한번 더 흘렀다. 편의점 안에 있던 일행이 합류하고 난 다음에야 그 여자 청소년은 고개를 들어 아저씨들이 앉아 있는 곳을 봤다. 아저씨들은 눈이 마주치자 캔맥주를 치켜들고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있는 쪽으로 작게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할 것 같아.” 나도 그랬다. 그나저나 저 말을 듣고 취객이 흥분해 시비를 걸지도 모르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때 편의점 건물 위층 학원에서 또래 학생들 십수명이 나왔고 그중 몇몇이 합류하자 아저씨들은 어쩐지 황급히 자리를 떴다. 한달 전에 집 근처 편의점에서 목격한 이 장면이 내내 마음에 남아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일들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맛있는 거 사주려고 한 게 뭐가 문제냐고 ‘선의’라며 이런 행동을 두둔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상대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은 훨씬 정중하게 행동하고 조심스럽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를 묻고 필요없다고 거절하면 즉각 물러난다. 하지만 저 ‘아저씨’들은 반말로 무례하게 접근했고 그조차 대답을 듣지 못했다며 단 한 문장 만에 언짢음을 표시했다. 이것은 선의가 아니다. 자신이 성별과 나이 위계에서 우위에 있다는 전제 아래 제 맘대로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일 뿐이다. 그러니까 한 문장 만에 바로 언성을 높여 내 말을 무시한다고 항의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지난 23일에는 홍대 앞에서 일본인 여성 ㄱ(19)씨가 한국인 남성 ㄴ(33)씨에게 길거리에서 폭행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 조사를 받은 한국인 남성은 말을 걸었는데 거부당해 울컥한 마음에 머리채를 잡았을 뿐 폭행은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ㄴ씨가 계속 성큼성큼 따라오며 성적인 모욕적인 언행과 함께 일본에 대한 증오를 내뱉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언급하려는 건 그 가해 당사자의 행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를 대신해서 사과하려고 한 사람들의 ‘선의’에 대해서이다. 사실 나도 이 사건을 처음 듣고 화나고 부끄럽고 미안했다. 하지만 ㄱ씨가 “한국인들이 왜 사과를 하지?”라고 의아한 표정으로 인터뷰하는 뉴스를 보고 나서야 ‘대신’ 사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ㄱ씨의 계정에 많은 한국인들이 와서 같은 한국인으로서 죄송하다는 댓글을 달고 있다고 한다. 이에 ㄱ씨는 “한국인분들 죄송하다고 말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한명의 나쁜 행동일 뿐 한국인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며 “한-일 관계가 이 일로 악화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후자의 문장이 사려깊다면 전자의 문장은 핵심을 꿰뚫고 있다. 사과를 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가해자를 대신해서 사과를 한다 해도 피해자는 그 사과를 받을 수 없다. 자신에게 사과하는 이들은 가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행동에 공동의 책임의식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윤리적 실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대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이 반일 정서에 기대 정당화될 수 있었을 거라고 혹시라도 생각했다면 그것은 단단히 착각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지, 가해 당사자를 대신해서 사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피해자에게 당신은 여기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고, 가해자를 대신해서 사과할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알려줄 뿐 사과 자체를 당도할 수 없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얕보거나 배제하면서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고 선의였다고 변명하지 말자. 선의는 그런 것보다 훨씬 나은 아름다운 감정에 붙여야 할 이름이다.
칼럼 |
[세상읽기] 그것은 선의가 아니다 / 권김현영 |
여성학 연구자 한달 전 밤 열시쯤의 일이다. 편의점 앞 현금인출기를 이용하려던 참이었다. 편의점 앞 탁자에 중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여자 청소년이 혼자 휴대폰을 보며 앉아 있었고, 일행은 편의점 안에서 먹을 것을 사고 있는 듯했다. 옆 탁자에선 중년의 남성 두 사람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남성 중 한명이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저씨들이 맛있는 거 사줄까?” 침묵이 흘렀다. “말을 걸었는데 대답을 안 하네?” 쌔한 느낌의 침묵이 한번 더 흘렀다. 편의점 안에 있던 일행이 합류하고 난 다음에야 그 여자 청소년은 고개를 들어 아저씨들이 앉아 있는 곳을 봤다. 아저씨들은 눈이 마주치자 캔맥주를 치켜들고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있는 쪽으로 작게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할 것 같아.” 나도 그랬다. 그나저나 저 말을 듣고 취객이 흥분해 시비를 걸지도 모르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때 편의점 건물 위층 학원에서 또래 학생들 십수명이 나왔고 그중 몇몇이 합류하자 아저씨들은 어쩐지 황급히 자리를 떴다. 한달 전에 집 근처 편의점에서 목격한 이 장면이 내내 마음에 남아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일들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맛있는 거 사주려고 한 게 뭐가 문제냐고 ‘선의’라며 이런 행동을 두둔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상대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은 훨씬 정중하게 행동하고 조심스럽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를 묻고 필요없다고 거절하면 즉각 물러난다. 하지만 저 ‘아저씨’들은 반말로 무례하게 접근했고 그조차 대답을 듣지 못했다며 단 한 문장 만에 언짢음을 표시했다. 이것은 선의가 아니다. 자신이 성별과 나이 위계에서 우위에 있다는 전제 아래 제 맘대로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일 뿐이다. 그러니까 한 문장 만에 바로 언성을 높여 내 말을 무시한다고 항의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지난 23일에는 홍대 앞에서 일본인 여성 ㄱ(19)씨가 한국인 남성 ㄴ(33)씨에게 길거리에서 폭행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 조사를 받은 한국인 남성은 말을 걸었는데 거부당해 울컥한 마음에 머리채를 잡았을 뿐 폭행은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ㄴ씨가 계속 성큼성큼 따라오며 성적인 모욕적인 언행과 함께 일본에 대한 증오를 내뱉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언급하려는 건 그 가해 당사자의 행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를 대신해서 사과하려고 한 사람들의 ‘선의’에 대해서이다. 사실 나도 이 사건을 처음 듣고 화나고 부끄럽고 미안했다. 하지만 ㄱ씨가 “한국인들이 왜 사과를 하지?”라고 의아한 표정으로 인터뷰하는 뉴스를 보고 나서야 ‘대신’ 사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ㄱ씨의 계정에 많은 한국인들이 와서 같은 한국인으로서 죄송하다는 댓글을 달고 있다고 한다. 이에 ㄱ씨는 “한국인분들 죄송하다고 말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한명의 나쁜 행동일 뿐 한국인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며 “한-일 관계가 이 일로 악화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후자의 문장이 사려깊다면 전자의 문장은 핵심을 꿰뚫고 있다. 사과를 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가해자를 대신해서 사과를 한다 해도 피해자는 그 사과를 받을 수 없다. 자신에게 사과하는 이들은 가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행동에 공동의 책임의식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윤리적 실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대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이 반일 정서에 기대 정당화될 수 있었을 거라고 혹시라도 생각했다면 그것은 단단히 착각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지, 가해 당사자를 대신해서 사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피해자에게 당신은 여기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고, 가해자를 대신해서 사과할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알려줄 뿐 사과 자체를 당도할 수 없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얕보거나 배제하면서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고 선의였다고 변명하지 말자. 선의는 그런 것보다 훨씬 나은 아름다운 감정에 붙여야 할 이름이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