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언론이 비추는 요즘 세상은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축으로 돈다. 온갖 언론사가 쏟아내는 압도적인 기사량이 보여주듯이 자전 운동의 인력이 막대하다. 이 칼럼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 논란에 직접 참가할 생각은 없다. 단지 그가 남긴 숙제를 푸는 데 주력하련다. 거의 모든 언론이 후보자 딸의 ‘특별한’ 교육 이력을 겨냥한다. 특수목적고-명문대-의학전문대학원으로 이어지는 경력이 의심스럽다는 거다. 의심은 특히 두 지점을 지목한다. 한편에서는 선발 과정의 공정성을 의심한다. 혹시 특혜나 불법이 작용한 건 아닐까? 다른 한편에서는 선발 과정 전체의 편향성을 의심한다. 행여 선발 과정이 특정 계급이나 계층에게 유리하게 짜인 게 아닐까? 대학교 총학생회의 대응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얄궂게도 두 국립대 총학생회의 대응이 대조적이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촛불집회를 열었고, 경북대 총학생회는 성명을 발표했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에서도 갈린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특혜와 불법 의혹에 집중했고, 경북대 총학생회는 더 큰 틀에서 사안을 보고자 했다. 그러니까 후보자 가족만이 아니라 특권 계층, 무엇보다 고위 공직자 전체의 ‘교육 전략’을 살펴야 하며, 더 나아가 특정 계급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짜인 입시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서울대 총학생회는 입시 제도보다 특혜와 불법 의혹에 집중하고, 경북대 총학생회는 특혜와 불법 의혹은 물론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입시 제도를 문제 삼는다.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의 입장이 적절해 보이지만 그에 멈출 수 없다. 더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현행 제도는 왜 등장했고, 어떤 문제를 지녔는가. 현행 대학 입시 제도는 필기시험으로 일원화된 예전 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안됐다. 필기시험을 위주로 하는 입시 제도의 문제는 명백하다. 학교를 학원처럼 만들고, 학생을 시험기계로 만들어 다양성을 저해하고, 사교육에 크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학생부종합전형이 도입됐다. 그것은 학생들의 다양한 학내외 활동을 고루고루 평가한다. 그로써 학교를 학교답게 만들고, 필기시험과 사교육 의존도를 낮추어 학생을 다양화하고, 결국 학업 경쟁을 완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러한 정책 목표 중에 어느 하나 제대로 달성된 것이 없다. 오히려 예전 문제점에 새로운 문제점이 추가됐다. 수능은 예전 시험과 다르지 않고 학생부종합전형은 부모의 영향력을 키웠다. 이를테면 학내외 활동이 다양하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그것은 ‘적절’해야 한다. 적절함을 가늠할 수 있는 감각을 부모가 가지고 있거나(문화 자본), 전문적인 ‘입시 코디’의 도움을 사거나(경제 자본), 그도 아니라면 부모 인맥(사회 자본)을 통해 적절한 경력을 만들면 된다. 나는 장관 후보자가 그 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소유한 압도적인 문화, 경제, 사회 자본이 딸의 특별한 교육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그와 함께 우리가 꿈꾸는 건 출신 계급으로 교육적 성공이 좌우되는 세상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남긴 고약한 숙제다. 숙제를 푸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예전 제도로의 복귀다. 수능 점수에 따라 대학을 배정하는 거다. 그러면 최소한 사회 자본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를 권할 수 없다. 이미 실패한 제도로의 복귀는 아무래도 꺼려진다. 둘째,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다. 예컨대 <한겨레> 김규원 기자가 지난주 칼럼에서 소개한 대학입학자격시험의 도입과 대학통합네트워크의 구축(정진상 경상대 교수)이 유망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숙제를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계층보다 특권 계층이 새로운 제도에 더 빠르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입 제도의 잦은 교체는 사회적 차이를 공고하게 다질 기회를 제공하기 십상이다. 셋째, 대입 제도를 바꾸는 데 사용할 에너지를 아껴서 사회 개혁에 ‘몰빵’하는 방법이다. 공정한 교육을 통해 특권을 ‘평준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특권이 지속되는 한 그것을 새롭게 취하거나 이미 가진 특권을 지키려는 교육적 노력이 줄어들 리 없으며, 그 경쟁이 누구에게 유리할지도 명백하다. 요컨대 교육 개혁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보다 사회 개혁을 통해 교육을 바꾸는 게 더 나은 방법이다.
칼럼 |
[세상읽기] 조국이 남긴 숙제를 푸는 방법 / 전상진 |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언론이 비추는 요즘 세상은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축으로 돈다. 온갖 언론사가 쏟아내는 압도적인 기사량이 보여주듯이 자전 운동의 인력이 막대하다. 이 칼럼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 논란에 직접 참가할 생각은 없다. 단지 그가 남긴 숙제를 푸는 데 주력하련다. 거의 모든 언론이 후보자 딸의 ‘특별한’ 교육 이력을 겨냥한다. 특수목적고-명문대-의학전문대학원으로 이어지는 경력이 의심스럽다는 거다. 의심은 특히 두 지점을 지목한다. 한편에서는 선발 과정의 공정성을 의심한다. 혹시 특혜나 불법이 작용한 건 아닐까? 다른 한편에서는 선발 과정 전체의 편향성을 의심한다. 행여 선발 과정이 특정 계급이나 계층에게 유리하게 짜인 게 아닐까? 대학교 총학생회의 대응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얄궂게도 두 국립대 총학생회의 대응이 대조적이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촛불집회를 열었고, 경북대 총학생회는 성명을 발표했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에서도 갈린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특혜와 불법 의혹에 집중했고, 경북대 총학생회는 더 큰 틀에서 사안을 보고자 했다. 그러니까 후보자 가족만이 아니라 특권 계층, 무엇보다 고위 공직자 전체의 ‘교육 전략’을 살펴야 하며, 더 나아가 특정 계급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짜인 입시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서울대 총학생회는 입시 제도보다 특혜와 불법 의혹에 집중하고, 경북대 총학생회는 특혜와 불법 의혹은 물론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입시 제도를 문제 삼는다.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의 입장이 적절해 보이지만 그에 멈출 수 없다. 더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현행 제도는 왜 등장했고, 어떤 문제를 지녔는가. 현행 대학 입시 제도는 필기시험으로 일원화된 예전 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안됐다. 필기시험을 위주로 하는 입시 제도의 문제는 명백하다. 학교를 학원처럼 만들고, 학생을 시험기계로 만들어 다양성을 저해하고, 사교육에 크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학생부종합전형이 도입됐다. 그것은 학생들의 다양한 학내외 활동을 고루고루 평가한다. 그로써 학교를 학교답게 만들고, 필기시험과 사교육 의존도를 낮추어 학생을 다양화하고, 결국 학업 경쟁을 완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러한 정책 목표 중에 어느 하나 제대로 달성된 것이 없다. 오히려 예전 문제점에 새로운 문제점이 추가됐다. 수능은 예전 시험과 다르지 않고 학생부종합전형은 부모의 영향력을 키웠다. 이를테면 학내외 활동이 다양하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그것은 ‘적절’해야 한다. 적절함을 가늠할 수 있는 감각을 부모가 가지고 있거나(문화 자본), 전문적인 ‘입시 코디’의 도움을 사거나(경제 자본), 그도 아니라면 부모 인맥(사회 자본)을 통해 적절한 경력을 만들면 된다. 나는 장관 후보자가 그 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소유한 압도적인 문화, 경제, 사회 자본이 딸의 특별한 교육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그와 함께 우리가 꿈꾸는 건 출신 계급으로 교육적 성공이 좌우되는 세상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남긴 고약한 숙제다. 숙제를 푸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예전 제도로의 복귀다. 수능 점수에 따라 대학을 배정하는 거다. 그러면 최소한 사회 자본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를 권할 수 없다. 이미 실패한 제도로의 복귀는 아무래도 꺼려진다. 둘째,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다. 예컨대 <한겨레> 김규원 기자가 지난주 칼럼에서 소개한 대학입학자격시험의 도입과 대학통합네트워크의 구축(정진상 경상대 교수)이 유망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숙제를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계층보다 특권 계층이 새로운 제도에 더 빠르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입 제도의 잦은 교체는 사회적 차이를 공고하게 다질 기회를 제공하기 십상이다. 셋째, 대입 제도를 바꾸는 데 사용할 에너지를 아껴서 사회 개혁에 ‘몰빵’하는 방법이다. 공정한 교육을 통해 특권을 ‘평준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특권이 지속되는 한 그것을 새롭게 취하거나 이미 가진 특권을 지키려는 교육적 노력이 줄어들 리 없으며, 그 경쟁이 누구에게 유리할지도 명백하다. 요컨대 교육 개혁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보다 사회 개혁을 통해 교육을 바꾸는 게 더 나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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