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서둘러 일을 마치고 달려갔지만 행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지난 9월4일 대구시 중구청 대강당에서 장애인 탈시설 증언대회가 사회복지의 날을 기념하여 열렸다. 당사자로부터 시설에서 살던 경험과 시설을 나와서 한 자립생활 경험을 직접 듣고 배울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하지만 정작 증언은 놓치고 대신 받아온 자료집 ‘나는 누군가의 자립생활이다!’에 실린 여덟 사람의 경험을 천천히 또박또박 읽었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이수나씨는 열살도 되지 않아 입소한 시설에서 스무명 가까운 사람들과 네평쯤 되는 방에서 같이 살았다고 했다. 시설에는 그런 방이 일곱개쯤 있었다고. 끼니때마다 대접 하나에 밥과 국, 김치, 반찬을 하나로 섞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유까지 뿌려 나오던 식사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가장 오래 지낸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은 방 입구가 유리로 되어 있어 시설을 방문한 국회의원이나 자원봉사자들이 들여다보게 해놓았더랬다. 그룹홈이라고 하여 간 곳은 방이 두개 있었는데 남자 일곱, 여자 일곱이 각각 한 방씩 쓰고 화장실 하나를 같이 썼다. 입구에 커튼이 있다 해도 누구든 씻을 때 노출을 피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수나씨는 여덟살부터 이십사년을 이렇게 시설에서 살았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역사 한 줄기는 한국전쟁 이후 전쟁고아와 이재민 수용시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비바람을 피해 잘 수 있고 배를 곯지 않는 것이 복지였고 외국의 원조로 대부분의 재정을 감당하던 구호의 시대였다. 가족 없고, 돈 없고, 거처 없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가족과 직업과 거처를 가진 보통사람의 사회”에서 분리되어 시설로 수용되었다. 수용보호 방식의 시설은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회복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들어 사회복지기관들이 지역사회에 세워져 사회복지서비스가 점차 확대되었어도 시설은 유형을 확장하며 자리를 지켰다. 지금도 보건복지부는 사회복지시설을 생활시설과 이용시설로 구분하고 있다. 생활시설은 말 그대로 먹고 자는 생활이 이루어지는 시설을 말한다. “보통사람”은 먹고 자고 쉬는 곳을 “집”이라 부르는데 누군가에게는 “생활시설”이 된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커뮤니티 케어 정책(지역사회 통합돌봄 정책)은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이건 노인이건 살던 방식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역기반 지원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커뮤니티 케어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우리나라 시설복지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특히 노인, 장애인, 아동 등 인구집단별로 나뉘어 운영되는 생활시설, 거주시설의 현대화가 필요하다. 탈시설 정책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라고 시설을 없애는 것이냐”는 일부 장애인 가족에게 탈시설이 서비스 중지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역지사지의 자세로 ‘시설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을 시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집이다. 외형상 대형 시설로 보이는 아파트를 스스럼없이 집이라 부르는 것은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기준으로 “생활시설”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양로시설, 장애인거주시설, 아동양육시설, 노숙인 자활·재활·요양시설들은 과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보장하고 있는가? 한 방에 예닐곱 사람이 몇년씩 같이 사는 공간에서 사생활의 자리는 있기 어려울 것이며, 사생활 없는 공간에서 인권과 자율성, 상호 존중의 태도가 싹트기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집의 주인은 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을 따르며 사는 곳을 내 집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집에서 사는 방식은 사는 사람이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집에서 살지, 누구와 살지를 정하는 것도 당사자의 중요한 선택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먹고 자고 쉬는 곳을 집이라고 한다면 시설은 보통 집에서 충족하기 어려운 특별한 기능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요양과 치료와 교육과 훈련 등을 제공하는 시설은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공간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요양시설, 의료시설, 교육시설, 재활시설이 집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집에서 살고 집에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시설복지 패러다임을 대신하기를 바란다.
칼럼 |
[세상읽기] 복지시설이 집이 될 수 있나 / 양난주 |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서둘러 일을 마치고 달려갔지만 행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지난 9월4일 대구시 중구청 대강당에서 장애인 탈시설 증언대회가 사회복지의 날을 기념하여 열렸다. 당사자로부터 시설에서 살던 경험과 시설을 나와서 한 자립생활 경험을 직접 듣고 배울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하지만 정작 증언은 놓치고 대신 받아온 자료집 ‘나는 누군가의 자립생활이다!’에 실린 여덟 사람의 경험을 천천히 또박또박 읽었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이수나씨는 열살도 되지 않아 입소한 시설에서 스무명 가까운 사람들과 네평쯤 되는 방에서 같이 살았다고 했다. 시설에는 그런 방이 일곱개쯤 있었다고. 끼니때마다 대접 하나에 밥과 국, 김치, 반찬을 하나로 섞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유까지 뿌려 나오던 식사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가장 오래 지낸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은 방 입구가 유리로 되어 있어 시설을 방문한 국회의원이나 자원봉사자들이 들여다보게 해놓았더랬다. 그룹홈이라고 하여 간 곳은 방이 두개 있었는데 남자 일곱, 여자 일곱이 각각 한 방씩 쓰고 화장실 하나를 같이 썼다. 입구에 커튼이 있다 해도 누구든 씻을 때 노출을 피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수나씨는 여덟살부터 이십사년을 이렇게 시설에서 살았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역사 한 줄기는 한국전쟁 이후 전쟁고아와 이재민 수용시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비바람을 피해 잘 수 있고 배를 곯지 않는 것이 복지였고 외국의 원조로 대부분의 재정을 감당하던 구호의 시대였다. 가족 없고, 돈 없고, 거처 없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가족과 직업과 거처를 가진 보통사람의 사회”에서 분리되어 시설로 수용되었다. 수용보호 방식의 시설은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회복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들어 사회복지기관들이 지역사회에 세워져 사회복지서비스가 점차 확대되었어도 시설은 유형을 확장하며 자리를 지켰다. 지금도 보건복지부는 사회복지시설을 생활시설과 이용시설로 구분하고 있다. 생활시설은 말 그대로 먹고 자는 생활이 이루어지는 시설을 말한다. “보통사람”은 먹고 자고 쉬는 곳을 “집”이라 부르는데 누군가에게는 “생활시설”이 된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커뮤니티 케어 정책(지역사회 통합돌봄 정책)은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이건 노인이건 살던 방식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역기반 지원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커뮤니티 케어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우리나라 시설복지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특히 노인, 장애인, 아동 등 인구집단별로 나뉘어 운영되는 생활시설, 거주시설의 현대화가 필요하다. 탈시설 정책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라고 시설을 없애는 것이냐”는 일부 장애인 가족에게 탈시설이 서비스 중지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역지사지의 자세로 ‘시설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을 시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집이다. 외형상 대형 시설로 보이는 아파트를 스스럼없이 집이라 부르는 것은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기준으로 “생활시설”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양로시설, 장애인거주시설, 아동양육시설, 노숙인 자활·재활·요양시설들은 과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보장하고 있는가? 한 방에 예닐곱 사람이 몇년씩 같이 사는 공간에서 사생활의 자리는 있기 어려울 것이며, 사생활 없는 공간에서 인권과 자율성, 상호 존중의 태도가 싹트기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집의 주인은 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을 따르며 사는 곳을 내 집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집에서 사는 방식은 사는 사람이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집에서 살지, 누구와 살지를 정하는 것도 당사자의 중요한 선택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먹고 자고 쉬는 곳을 집이라고 한다면 시설은 보통 집에서 충족하기 어려운 특별한 기능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요양과 치료와 교육과 훈련 등을 제공하는 시설은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공간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요양시설, 의료시설, 교육시설, 재활시설이 집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집에서 살고 집에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시설복지 패러다임을 대신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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