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권기록활동가 분식집 메뉴판을 세번이나 훑어보았다. 40여가지의 음식 중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칼국수와 비빔밥뿐이었다. 대단한 선택이라도 되는 양 둘 사이에서 오래 번민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주문했다. “비빔밥 주세요.” 주문이 주방으로 전달되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또 갈등했다. 어제 못한 그 말을 오늘은 할 수 있을까. 사랑 고백이라도 하듯 한참을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 힘껏 말해보았다. “계란프라이는 빼주세요.” 휴, 해냈다. 이게 뭐라고, 몹시 뿌듯했다. 오늘치의 작은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던 찰나, 밑반찬으로 나온 계란말이를 보았다. 오늘도 실패다. ‘탈육식’을 시작한 지 두달이 되었다. 고기는 어디에나 있다. 샐러드김밥에도 있고, 심지어 초코파이 속에도 있다. 동물권에 관해 제법 많은 영상과 책을 찾아보았다. ‘공장식 축산’이란 단어가 좀처럼 입에 익지 않아서, 책에서 읽은 몇가지 충격적인 장면들은 통째로 외웠다. 가령 이런 것들. 알을 낳는 게 목적인 산란계(닭)의 경우 쓸모가 없는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거대한 칼날이 24시간 돌아가는 분쇄기에 넣어 비료로 만든다거나, 새끼를 낳는 게 목적인 종돈(돼지)의 경우 평생 동안 ‘스톨’이라는 형틀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한 채 강간과 임신, 출산을 반복하다가 ‘회전율’이 떨어지면 햄버거 패티 같은 분쇄육이 된다는 것. 그들은 굳이 살처분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 어딘가에서 우리가 삼시 세끼 밥을 먹듯, 아니,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것 때문에, 일상적으로 고문당하고 살해되고 분쇄되고 있었다. 본 영상 중 내 마음을 가장 요동치게 만든 것은 동물권 단체 ‘디엑스이’(다이렉트 액션 에브리웨어-서울)가 벌인 일련의 불복종 시위였다. 8월의 어느 날, 20여명의 청년이 이마트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간 청년들은 정육코너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진열대의 붉은 포장육 위에 국화를 한송이씩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나만큼이나 당황했을 직원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청년들이 빠르게 도열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처럼 진지하고 엄숙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했다. “사람들만이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진 마세요. 나무와 바위, 작은 새들조차 세상을 느낄 수 있어요.” 그것은 마트 정육코너에서 불리기엔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나의 상식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그 시위가 너무 좋아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노래는 구호보다 과격하고 꽃은 칼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꽃을 든 이 게릴라들은 어디서 왔을까. 무엇을 보면 그렇게 먼 것들을 연결할 수 있게 될까. 그들이 본 것을 나도 보고 싶었다. 나는 청년들의 영상을 더 따라가보았다. 한달 전 그들은 경기도의 한 종돈장에서 끔찍한 환경에 노출된 아기 돼지 두마리를 ‘구조’하고 사산된 한마리를 품에 안고 나왔다. 충주의 닭 도살장에 갔던 날엔 그 입구를 막아 도살되기 직전 아기 닭들의 시간을 잠시 멈췄다. 그들은 한적한 산속에서 오직 인간의 입맛을 위해 참혹하게 도살되는 소와 돼지와 닭들의 비명과 두려움에 떠는 눈망울, 거친 숨소리를 기록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세상으로 전송했다. 죽은 아기 돼지의 장례를 치르고 내일이면 사라질 생명의 마지막 목격자가 된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서울이었다. 청년들이 향한 곳은 청와대나 검찰청, 광화문광장이 아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버거킹과 배스킨라빈스와 이마트였다. 아직 살아 있던 동물들의 살고 싶어 하는 절박한 눈빛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가장 무참한 그곳에서 청년들이 외쳤다.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죽이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이마트 방해 시위 영상을 보았다. 인간을 위해 동물들을 착취하는 것이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사회 질서 속으로 꽃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청년들은 고속도로 위의 고라니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동시에 주택가에 나타난 야생 멧돼지처럼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각국의 정상들에게 ‘헛된 말을 그만두라’ 호통치는 열여섯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처럼 위엄이 넘쳤다. 같은 시위를 보고 있었지만 이번에 나는 전혀 웃지 않고 조금 울고 있었다.
칼럼 |
[세상읽기] 그들이 본 것 / 홍은전 |
작가·인권기록활동가 분식집 메뉴판을 세번이나 훑어보았다. 40여가지의 음식 중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칼국수와 비빔밥뿐이었다. 대단한 선택이라도 되는 양 둘 사이에서 오래 번민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주문했다. “비빔밥 주세요.” 주문이 주방으로 전달되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또 갈등했다. 어제 못한 그 말을 오늘은 할 수 있을까. 사랑 고백이라도 하듯 한참을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 힘껏 말해보았다. “계란프라이는 빼주세요.” 휴, 해냈다. 이게 뭐라고, 몹시 뿌듯했다. 오늘치의 작은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던 찰나, 밑반찬으로 나온 계란말이를 보았다. 오늘도 실패다. ‘탈육식’을 시작한 지 두달이 되었다. 고기는 어디에나 있다. 샐러드김밥에도 있고, 심지어 초코파이 속에도 있다. 동물권에 관해 제법 많은 영상과 책을 찾아보았다. ‘공장식 축산’이란 단어가 좀처럼 입에 익지 않아서, 책에서 읽은 몇가지 충격적인 장면들은 통째로 외웠다. 가령 이런 것들. 알을 낳는 게 목적인 산란계(닭)의 경우 쓸모가 없는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거대한 칼날이 24시간 돌아가는 분쇄기에 넣어 비료로 만든다거나, 새끼를 낳는 게 목적인 종돈(돼지)의 경우 평생 동안 ‘스톨’이라는 형틀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한 채 강간과 임신, 출산을 반복하다가 ‘회전율’이 떨어지면 햄버거 패티 같은 분쇄육이 된다는 것. 그들은 굳이 살처분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 어딘가에서 우리가 삼시 세끼 밥을 먹듯, 아니,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것 때문에, 일상적으로 고문당하고 살해되고 분쇄되고 있었다. 본 영상 중 내 마음을 가장 요동치게 만든 것은 동물권 단체 ‘디엑스이’(다이렉트 액션 에브리웨어-서울)가 벌인 일련의 불복종 시위였다. 8월의 어느 날, 20여명의 청년이 이마트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간 청년들은 정육코너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진열대의 붉은 포장육 위에 국화를 한송이씩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나만큼이나 당황했을 직원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청년들이 빠르게 도열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처럼 진지하고 엄숙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했다. “사람들만이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진 마세요. 나무와 바위, 작은 새들조차 세상을 느낄 수 있어요.” 그것은 마트 정육코너에서 불리기엔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나의 상식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그 시위가 너무 좋아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노래는 구호보다 과격하고 꽃은 칼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꽃을 든 이 게릴라들은 어디서 왔을까. 무엇을 보면 그렇게 먼 것들을 연결할 수 있게 될까. 그들이 본 것을 나도 보고 싶었다. 나는 청년들의 영상을 더 따라가보았다. 한달 전 그들은 경기도의 한 종돈장에서 끔찍한 환경에 노출된 아기 돼지 두마리를 ‘구조’하고 사산된 한마리를 품에 안고 나왔다. 충주의 닭 도살장에 갔던 날엔 그 입구를 막아 도살되기 직전 아기 닭들의 시간을 잠시 멈췄다. 그들은 한적한 산속에서 오직 인간의 입맛을 위해 참혹하게 도살되는 소와 돼지와 닭들의 비명과 두려움에 떠는 눈망울, 거친 숨소리를 기록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세상으로 전송했다. 죽은 아기 돼지의 장례를 치르고 내일이면 사라질 생명의 마지막 목격자가 된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서울이었다. 청년들이 향한 곳은 청와대나 검찰청, 광화문광장이 아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버거킹과 배스킨라빈스와 이마트였다. 아직 살아 있던 동물들의 살고 싶어 하는 절박한 눈빛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가장 무참한 그곳에서 청년들이 외쳤다.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죽이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이마트 방해 시위 영상을 보았다. 인간을 위해 동물들을 착취하는 것이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사회 질서 속으로 꽃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청년들은 고속도로 위의 고라니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동시에 주택가에 나타난 야생 멧돼지처럼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각국의 정상들에게 ‘헛된 말을 그만두라’ 호통치는 열여섯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처럼 위엄이 넘쳤다. 같은 시위를 보고 있었지만 이번에 나는 전혀 웃지 않고 조금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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