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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01 16:52 수정 : 2019.10.02 12:38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두어달 전에 찾았던 부산 해운대 엘시티 건물은 고압적이었다. 굳이 한층을 더해 101층을 만들겠다는 집착, 그리고 초대형 비리 사건을 뚫고 기어이 쌓아 올리는 집념이 늦여름 후덥지근한 빗방울로 뚝뚝 떨어졌다. 저렇게 높이 올리는 인간의 능력과 그곳에서 행복하겠다는 사람들의 용기가 새삼 경외로웠다.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과학이 있었다고 한다. 풍속 70m/s의 강풍과 지진 진도 7.0에서 버틸 수 있도록 ‘아웃리거 벨트월’ 시스템을 적용했고, 힘이 센 초고강도 강재 ‘HSA800강’도 사용했단다. 분야별 최고 전문가를 수백명 동원하여 “안전과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고 “가능한 모든 변수를 사전에 예측해 대응한다”고 했다.

이런 초정밀 과학에 ‘일하는 사람’은 빠져 있었다. 여기서 작년 5월에 노동자 네명이 사고로 죽었다. 바람과 지진에 이긴다는 초강재와 초첨단 기술 현장에서, 간단한 구조물 고정장치가 빠져버렸다. 그 책임을 물어 안전 관련 책임자 3명을 구속하려 했으나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입주민을 위해 공사는 재개되었고, 그 근처에서는 ‘죽음의 일터’가 계속되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다가 죽고, 아파트를 짓다가 죽었다. 며칠 전에는 오페라하우스 공사장에서 크레인이 기사와 함께 무너졌다.

조금 더 올라가면 울산이다. 어느 조선소는 위기 극복 대책으로 수조원에 이르는 연구개발(R&D) 투자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술 경쟁력 강화와 핵심 인재 육성이 핵심이라고 새삼스레 강조했다. 세계 최고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는 기업정책에 노동자는 역시 빠져 있다. 얼마 전에 노동자가 탱크 절단 작업을 하다가 절단된 철판에 끼였다. 기술은 21세기 유토피아에, 안전은 철기시대에 머물렀다. 이런 부조리한 공존이 가능한 것은 죽은 자가 하청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일터’는 빈틈을 남겨두질 않는다. 청소년에게 ‘밝은’ 일자리의 미래를 만들어준다는 특성화고에 간 아이들은 일하다가 죽어간다. 너무나 위험한데도, 부모는 “쓰러져도 회사에 가서 쓰러져라”고 하고, 선생님은 “학교 이미지가 안 좋아지니까 참으라”고 한다. “어른들 말은 들으면 좋지만 안 듣는 게 좋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하는 아이들은 이때만은 어른들 말을 듣고 일을 계속한다. “위험해도 이거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사실상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가 내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필사적 믿음을 내세우며 묵인하고 공모한다. 그래서 일터의 위험은 쉽게 과소평가된다. 이를 이용해 위험스러운 장사판을 벌이려는 사람들도 넘친다. 그 결과는 익숙한 사고의 반복이다. 우리는 잠시 화내거나 슬퍼한 뒤 다시 거대한 묵인의 세계로 같이 숨어든다. 남는 것은 그들의 죽음을 기록한 숫자일 뿐이다. 김훈 작가의 말은 그래서 아프다. “죽음은 무의미한 통계 숫자처럼 일상화되어서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한다.

대통령은 “2022년까지 산재 사망자 수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작년에도 사망자 수는 거의 줄지 않았다. “우리가 김용균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지금도 매일 세명의 김용균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안녕하다. 목표 달성은 난망하다.

묘책이 없다고도 한다. 당연하다. 가진 것을 모두 쥐고 있으면서 ‘죽음의 일터’를 막을 묘책은 없다. 일터의 안전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사실 손실도 아니다. 위험을 저당 잡고 누리는 잘못된 이익을 바로잡는 일이다. 따라서 정부는 과감해야 한다. ‘경제 기여’라는 자의적 잣대로 기업에 관대해져서는 안 된다. 산업안전에 대한 투자는 기술투자만큼 중요하다. 정부가 장려하고, 필요하다면 강제할 일이다.

정부만의 일도 아니다. 동료의 안전을 위해 나서자. 일터가 잠시 중단되는 불편도 마다하지 말자. 혼자 하기 힘든 이런 일, 같이 하자고 만든 것이 노조다. 선연한 핏방울 앞에서 작업복 색깔의 차이를 내세울 수는 없다. 소비자도 할 일이 많다. 내 아파트에 안전사고가 생기면 건설사에 항의하자. 나의 보금자리에 억울한 원혼이 떠돌지 않길 바라는 염원으로, 마구 거칠게 따지자. 그리고 그 못난 ‘신성한 노동’을 내세워 학생들을 사지에 내몰지 말자.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묵묵히 일하는 것이 어찌 어른이 되는 길인가. ‘거대한 공동의 묵인’을 끝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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