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인권에는 양보가 없습니다.” 다산인권센터의 구호다. 쓰기 시작한 때는 김대중 대통령의 시대였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진 초창기였다. 본격적으로 인권이 제도화되고, 저항의 언어였던 인권이 보편의 언어로 가까이 다가설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참 야멸찬 구호를 들었다. 권위주의 시대가 가고 국가 인권보장 체계가 만들어지는 마당이었기에 구호의 고집스러움은 더욱 두드러졌다. 당시에는 오히려 대단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일종의 걱정과 두려움이 낳은 결과였더라. 불화 덩어리 인권이 제도에서 제대로 안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과 불안 말이다. 인권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로 정의된다. ‘모든 사람’이 존엄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권이 현실에서 드러나는 방식은 그다지 평온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 쟁점으로 떠오르는 사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난민과 성소수자, 청소년이 동등한 시민으로 살기 위한 논쟁은 늘 치열하다.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국가보안법도 그렇다. ‘그게 무슨 인권의 문제인가’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앞서 말한 사회문제는 국제사회가 인권규범으로 ‘언제까지 모른 척할 것인가’라고 질문한 내용들이다. ‘모든 사람’에 포함되기 위해 분투하지 않으면 모두는 모두가 되기 쉽지 않다. 이런 불화성을 지닌 인권이 한 사회의 제도와 만난 것이니 당연히 제도가 그것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21세기 초반에 우리가 느꼈던 불안은 그래서 ‘인권에는 양보가 없다’는 비타협적인 구호로 등장했다. 역시나 인권위로 대표되는 인권의 제도는 정권과 정치의 부침을 통해 잦은 실망을 안겼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의 인권위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존재였다. 인권활동가에게는 일거리를 하나 더 만들어주는 국가기관일 뿐이었다. 독립적 국가기구라는 이름은 법전에나 있었다. 지금은 괜찮을까? 정권이 바뀌고 위원장도 시민사회가 존경하는 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다. 지난 정부에서 인권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없었던 인권위 내부는 과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합당한 성찰과 반성의 말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 ‘총선 전까지 차별금지법을 이슈화하지 말라’ 했다는 보도를 보면서 느낀 심정도 비슷했다. 제도는 아직 인권을 불수용하고 있구나, 심지어 인권위조차!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인권교육을 의뢰하고 의견을 요구하는 자리는 늘었다. 경찰, 검찰, 국방부까지 인권교육을 요청하는 곳도 다양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인권으로 등 따습게 살 수 있을 정도다. 광주에서 있었던 세계인권도시포럼에 참여해보니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인권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인권조례를 만들었고 인권행정팀과 거버넌스를 구축한 곳이 상당하다. 지자체장들과 공무원, 인권활동가들, 국외 초청 인사들이 참여한 행사는 풍성했다. 지속가능한 인권발전을 위한 논의도 뜨거웠다. 그러나 참여자인 한 사람으로 느낀 소회는 배부르지 않았다. 최근 지자체에서 만든 조례들은 인권과 관련한 단어만 들어가도, 좌초되고 있다. ‘성평등’ ‘이주민’ ‘차별’ ‘민주주의’ ‘다양성’이 포함되면 여지없이 발의가 취소되거나 보류 처분되고 있다. 대부분 이를 반대하는 세력의 말을 여론으로 인정한 결과다. 여론에 약한 정치인들은 문제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포기하고 기회를 보겠다, 다음에 하겠다는 말을 버젓이 하고 있다. 저들의 말이 합당한 반론이 아님을 알면서도 용기를 내지 않는다. 신이 난 혐오의 말들은 이곳저곳을 마구 공격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말조차 “그건 동성애자들을 인정하자는 말이냐”라는 공격을 받게 생겼다. 세계인권도시포럼에서 인권의 자리가 여전히 초라함을 느낀 것은 이 대목 때문이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인권은 기회주의다. 인권제도는 화려할 필요 없다. 비겁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덧. 아이돌그룹 에이오에이(AOA)가 커버한 곡 ‘너나 해’(Egotistic)를 듣고 보면서 ‘시대가 변하고 있구나’ 감탄했다. 관료와 정치인들에게 추천한다. 이 페미하고 퀴어한 퍼포먼스를 보라. 사람들이 왜 열광하는지 살펴보길. 용기가 빛을 발할 때는 그래서 바로 지금 ‘롸잇나우’!
칼럼 |
[세상읽기] 비겁하지 않을 용기 / 박진 |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인권에는 양보가 없습니다.” 다산인권센터의 구호다. 쓰기 시작한 때는 김대중 대통령의 시대였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진 초창기였다. 본격적으로 인권이 제도화되고, 저항의 언어였던 인권이 보편의 언어로 가까이 다가설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참 야멸찬 구호를 들었다. 권위주의 시대가 가고 국가 인권보장 체계가 만들어지는 마당이었기에 구호의 고집스러움은 더욱 두드러졌다. 당시에는 오히려 대단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일종의 걱정과 두려움이 낳은 결과였더라. 불화 덩어리 인권이 제도에서 제대로 안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과 불안 말이다. 인권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로 정의된다. ‘모든 사람’이 존엄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권이 현실에서 드러나는 방식은 그다지 평온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 쟁점으로 떠오르는 사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난민과 성소수자, 청소년이 동등한 시민으로 살기 위한 논쟁은 늘 치열하다.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국가보안법도 그렇다. ‘그게 무슨 인권의 문제인가’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앞서 말한 사회문제는 국제사회가 인권규범으로 ‘언제까지 모른 척할 것인가’라고 질문한 내용들이다. ‘모든 사람’에 포함되기 위해 분투하지 않으면 모두는 모두가 되기 쉽지 않다. 이런 불화성을 지닌 인권이 한 사회의 제도와 만난 것이니 당연히 제도가 그것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21세기 초반에 우리가 느꼈던 불안은 그래서 ‘인권에는 양보가 없다’는 비타협적인 구호로 등장했다. 역시나 인권위로 대표되는 인권의 제도는 정권과 정치의 부침을 통해 잦은 실망을 안겼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의 인권위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존재였다. 인권활동가에게는 일거리를 하나 더 만들어주는 국가기관일 뿐이었다. 독립적 국가기구라는 이름은 법전에나 있었다. 지금은 괜찮을까? 정권이 바뀌고 위원장도 시민사회가 존경하는 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다. 지난 정부에서 인권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없었던 인권위 내부는 과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합당한 성찰과 반성의 말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 ‘총선 전까지 차별금지법을 이슈화하지 말라’ 했다는 보도를 보면서 느낀 심정도 비슷했다. 제도는 아직 인권을 불수용하고 있구나, 심지어 인권위조차!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인권교육을 의뢰하고 의견을 요구하는 자리는 늘었다. 경찰, 검찰, 국방부까지 인권교육을 요청하는 곳도 다양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인권으로 등 따습게 살 수 있을 정도다. 광주에서 있었던 세계인권도시포럼에 참여해보니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인권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인권조례를 만들었고 인권행정팀과 거버넌스를 구축한 곳이 상당하다. 지자체장들과 공무원, 인권활동가들, 국외 초청 인사들이 참여한 행사는 풍성했다. 지속가능한 인권발전을 위한 논의도 뜨거웠다. 그러나 참여자인 한 사람으로 느낀 소회는 배부르지 않았다. 최근 지자체에서 만든 조례들은 인권과 관련한 단어만 들어가도, 좌초되고 있다. ‘성평등’ ‘이주민’ ‘차별’ ‘민주주의’ ‘다양성’이 포함되면 여지없이 발의가 취소되거나 보류 처분되고 있다. 대부분 이를 반대하는 세력의 말을 여론으로 인정한 결과다. 여론에 약한 정치인들은 문제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포기하고 기회를 보겠다, 다음에 하겠다는 말을 버젓이 하고 있다. 저들의 말이 합당한 반론이 아님을 알면서도 용기를 내지 않는다. 신이 난 혐오의 말들은 이곳저곳을 마구 공격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말조차 “그건 동성애자들을 인정하자는 말이냐”라는 공격을 받게 생겼다. 세계인권도시포럼에서 인권의 자리가 여전히 초라함을 느낀 것은 이 대목 때문이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인권은 기회주의다. 인권제도는 화려할 필요 없다. 비겁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덧. 아이돌그룹 에이오에이(AOA)가 커버한 곡 ‘너나 해’(Egotistic)를 듣고 보면서 ‘시대가 변하고 있구나’ 감탄했다. 관료와 정치인들에게 추천한다. 이 페미하고 퀴어한 퍼포먼스를 보라. 사람들이 왜 열광하는지 살펴보길. 용기가 빛을 발할 때는 그래서 바로 지금 ‘롸잇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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