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17 18:21
수정 : 2019.11.18 19:46
김누리 ㅣ 중앙대 교수·독문학
“나는 패전국 독일의 총리가 아니라 해방된 독일의 총리입니다.”
1969년 10월21일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선출된 직후 세계를 향해 던진 제일성이다. 이 말은 전후 최초로 정권 교체에 성공한 브란트가 새로운 독일의 출발을 선언한 것이자, ‘승전국’ 미국에 대해 자주적인 정책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결연히 표명한 것이다. 돌아보면, 브란트의 이 대미 ‘독립선언’은 독일 통일의 신호탄이었다.
만약 브란트가 이전 총리들처럼 ‘패전국의 총리’로서 굴신하며 미국에 종속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통일의 길을 연 동방정책은 추진될 수 없었을 것이고, 아직도 베를린에는 냉전의 장벽이 버티고 서 있을지도 모른다. 독일 통일의 길은 바로 서독이 미국과의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취하면서 비로소 열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경우도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선결조건이다.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 없이는 한반도 평화도, 남북통일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2년간 뼈저리게 체험했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정체의 늪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과의 전통적인 종속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한반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새로운 한반도 질서를 창출할 수 없다.
이제라도 문재인 정부는 용기와 비전을 가지고 질적으로 새로운 대미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상황은 나쁘지 않다. 지금은 두가지 점에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적기다.
첫째, 문재인 정부의 역사적 정당성 때문이다.
브란트가 나치즘과 싸운 전력을 가진 총리였기에 ‘해방된 독일’을 대표할 수 있었던 것처럼, 문 대통령은 촛불혁명이 만들어낸 지도자이기에 ‘새로운 대한민국’을 상징한다. 과거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된 군사독재자들과 그 후예들이 미국에 굴종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문재인 정부는 당당하게 대한민국의 주권과 권리를 주장할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조롱받는 트럼프 정부와는 격이 다른 정부임을 자각하고 담대하게 행동해야 한다. 미국이 아무리 강한 나라라 해도 세계의 양심과 이성은 여전히 도덕적 권위의 편이다.
둘째, 미국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를 통해 종전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미국상, 즉 선망의 대상이자 구원자라는 미국의 환상이 대부분 깨졌다. 트럼프 치하에서 미국이 자유세계의 수호자도, 인권의 옹호자도, 정의의 사도도 아니며, 자신의 국익만을 탐하는 일개 패권국가에 지나지 않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우리 국민들도 미국의 ‘선의’에만 의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인지 마침내 알게 되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한 국민 다수의 지지는 미국에 대한 자주적 관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의 징표로서 문재인 정부의 집권 후반기는 ‘문재인 독트린’의 천명으로 시작하면 좋겠다. 분명한 외교원칙을 밝히지 않으면 미국의 부당한 요구에 대책 없이 끌려다니게 된다. 탈냉전 시대에 조응하는 자주적 외교원칙으로서 독트린에는 다음의 내용이 담겨야 한다. “1. 우리는 민족자결주의, 국민주권주의라는 근대국가의 기본이념에 입각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추구한다. 2.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반하는 모든 행동에 반대한다.” 이런 원칙이 공식적으로 천명된다면 이는 미국의 일방적인 압력에 맞설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매일같이 미국의 오만을 목도하고 있다. 국방장관, 국방차관, 합참의장, 한미연합사령관, 주한대사까지 총동원하여 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지소미아 종료 철회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작금의 상황은 미국이 과연 이 나라를 동맹은커녕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한다.
문재인 정부는 더욱 담대하게 미국과 상대해야 한다. 미국에 굴종하면서 하릴없이 끌려다녀서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견인할 수 없다. 이제 한-미 동맹도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해야 한다. ‘동맹’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동맹다운 동맹’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동맹관계는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이며, 상명하달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존중의 관계다. 우리가 미국 앞에 당당히 서야, 한반도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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