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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9 18:04 수정 : 2019.11.20 09:27

권김현영 ㅣ 여성학 연구자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와 같은 문구는 너무 큰 범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선동만 남을 뿐 구체성과 적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되도록 이런 문구를 쓰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쓴다. 그러나 이 표현이 더없이 들어맞아서 피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판사 손동환)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연루된 이른바 ‘별장 성접대 사건’의 핵심 인물 건설업자 윤중천의 성범죄 혐의에 대해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공소기각 및 면소했다. 결과적으로 성범죄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한 셈이다. 재판부는 이를 검찰 탓으로 돌렸다. 검찰이 적절히 공소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는 점에선 나 역시 재판부와 같은 생각이다. 검찰은 해당 사건에 대해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이유로 2013~2014년 두 차례에 걸쳐 불기소 처분을 한 바 있다. 김학의를 별장으로 ‘모셔 간’ 윤중천은 특수강간(성범죄)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 판결을 받았고, 그 결과 김학의의 성범죄 역시 함께 묻혔다.

이 사건을 다시 살펴본 이들은 입을 모아 조직 비호에 여념이 없던 검찰이 당시 사건을 다 “뭉개버렸다”고 표현한다. 주요 피의자였던 김학의는 별장에 간 적도 없고, 윤중천을 알지도 못한다며 거짓말을 했고, 윤중천은 천명이 넘는 유력인사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수시로 진술을 변경했다. 하지만 재판부가 신빙성을 따진 건 피해자의 진술뿐이었다. 얼마 전 윤중천이 현 검찰총장 윤석열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도 다시 윤중천의 입에 관심이 쏠렸고 그가 해당 언급 자체를 부인하자 그것이 곧 사실이 됐다.

피해자가 그토록 얻기 어려운 신뢰를 그가 이렇게 쉽게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 그에게 빚이라도 진 것일까. 합리적 의심이 든다. 재판부는 자유롭게 성을 향유한 것일 뿐 접대는 아니었다는 그의 주장이 다수의 피해자 진술과 배치되는데도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양형 이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윤중천이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 복무를 마친 뒤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구옥을 개축해 빌라로 분양하면서 사업적으로 성과를 냈으며, 이 과정에서 개발사업의 진입장벽을 넘으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장벽을 친분·인맥·압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그의 범행 동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재판부의 설명을 들으면, 이 사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사업을 하던 무산계급 출신의 건설업자가 무리하게 신분 상승을 하려는 마음에 현직 최고 권력자들과 호형호제하다가, 자신도 특권층이라 믿고 선을 넘어버린 풍운아의 스토리 말이다.

재판을 방청한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재판부가 가해자에게 ‘빙의’라도 한 줄 알았다고 전했다. 피해자 쪽에서 공소시효가 남았다고 주장한 근거는 상해 발생 시점에 대한 해석 차이다. 피해 여성은 지속적 성폭행의 후유증으로 우울증, 불면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진단받고 치료받고 있는 상태로서, 피해자 쪽 변호인단은 이런 후유증 자체를 상해가 발현된 시점으로 보아 공소시효 15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윤중천은 사실 전반을 부인하다가 성관계 촬영 사진이 나오자 사실관계를 일부 인정했다. 다수의 피해자가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다. 윤중천과 김학의 등이 피해자(들)에게 요구한 행위들은 서로 신뢰하고 친밀감을 나누는 관계에서도 좀처럼 수용되기 어려운 일들이었으며 피해자들이 이전에 비슷한 일에 노출된 적이 없다는 점 등을 종합해, 지난 6월4일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은 피해자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요구한 합리성은 결국 피해 여성의 삶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자백’과 다름없다. 반면 재판부는 가해자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그의 범행동기의 빈틈을 채워가며 장벽을 넘는 불굴의 인간상마저 부여할 정도다.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을 합쳐 ‘장학썬’ 사건으로 불린 한국의 지배남성문화의 성 적폐 문제는 경찰, 검찰, 재판부가 서로를 탓하며 초라하게 마무리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라는 문구를 대체할 문장을 찾지 못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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