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1.24 18:10 수정 : 2019.11.25 13:22

전상진 ㅣ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대학에서 11월 말은 논술 채점 기간이다. 논술 채점은 두 가지 이유로 힘들다. 채점할 답안지가 많아서 고되고, 학생과 그 가족에게 중요한 일이기에 손이 떨린다. 채점을 하다 보면 놀랄 만한 답안지를 다수 만난다. 긴 예시문을 짧은 시간에 파악하여 간명하지 않은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이렇게도 조리 있게 쓸 수 있다니. 훌륭한 답안지가 기쁨도 주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재능 있는 친구들을 수업에서 곧 만나리란 기대, 하지만 이런 출중한 친구들을 내 수업이 망가뜨리는 건 아닌지 하는 부담감.

아무튼 채점에 시달리다 보니, 앗 실수, 그에 몰두하다 보니 대입제도를 다시금 고민하게 된다. 제도를 둘러싼 논쟁은 양자택일의 사안이다. ‘수능 또는 학종’에서 지지하는 제도에 따라 입장이 갈리고 서로 논쟁을 벌이는 듯싶지만 양자가 공유하는 세 가지 가정이 있다. 첫째, 재능 있는 사람만이 희소한 재화와 지위를 취해야 한다. 둘째,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셋째, 불평등은 필수다. 인센티브이자 페널티로서 불평등이 필요하다는 거다. ‘공부를 잘하면 특권을 누릴 수 있다’거나 ‘저런 사람처럼 되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계급 차별(classism)적 협박이 우리를 분투하게 만든다.

수능 또는 학종(학생부종합전형) 논쟁에서 핵심은 앞의 두 가지 가정이다. 서로 상대방이 지지하는 제도가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하기에 재능 없는 사람이 재화와 지위를 부당하게 취하도록 만든다’는 거다. 부당함의 극치가 대물림이다. 물론 문제가 되는 대물림은 기업, 신문사, 건물, 아파트, 주식과 같은 재화의 상속이 아니다. 2세 국회의원이나 ‘셀레브리티’가 부모의 지역구나 셀레브리티 자본을 물려받는 것도 아니다. 오직 문제가 되는 건 교육 자본의 대물림이다. 사정이 비교적 괜찮은 부모와 학생이 불법, 탈법, 편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교육 자본의 상속이 문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더 ‘공정한’ 입시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거다. 왜 우리는 다른 상속에는 지극히 관대하면서 교육 대물림에만 극도로 예민한가? 다른 불공정에는 무심하면서 교육의 공정성에는 그리도 집착할까? 아마도 교육에 대한 믿음 때문이리라. 교육과 그 결과물인 학위와 자격증은 애오라지 본인의 재능과 노력과 성과의 결과물이어야만 한다. 교육이 성스러운 기준이기에 사회 불평등의 정당한 준거점이 될 수 있다. 내가 잘사는 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고, 너희가 못사는 건 게을렀기 때문이야.

사실 근대 교육은 과거 신분제 사회를 뿌리째 흔들었던 정치적 주장이었다. 부모 덕에 특권을 누리던 ‘고귀한’ 신분은 물론이고 그러한 신분의 세습을 비판하는 최고의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신분 세습의 시대가 지난 듯한 지금, 교육은 불평등과 특권을 효과적으로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부모가 ‘고귀한’ 계급이라서 자녀가 잘사는 것이련만, 오직 자녀의 탁월한 교육 성취가 그의 삶을 안락하게 만들었다 생각한다. 반대로 부모가 ‘미천한’ 계급이기에 자녀가 못살 수도 있으련만, 오직 자녀의 추레한 학업 성취가 고통 가득한 삶의 알리바이가 된다.

우리는 여전히 교육의 과거 명성에 취해 있는 듯싶다. 신분에 상관없이 각자의 재능, 노력, 성과로 재화와 지위가 분배된다는 이데올로기, 더 나아가 교육이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지렛대라는 믿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만연한 불공정과 부정의, 무엇보다 불평등의 대물림으로 망가진 사회를 교육으로, 이를테면 대입제도 개선 따위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자. 교육의 대물림이 문제인 것처럼 계급의 세습도 문제다. 모든 계급 세습이 문제는 아닐 테지만 각자의 재능, 노력, 성과에 상관없이 특권과 박탈 및 결핍이 상속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러니까 고장 난 사회를 고치려면 교육 세습에만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유산의 상속에도 주의를 기울이자. 교육의 공정성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유산 상속의 공정성에도 주목하자. 교육과 별 상관없는 사회 문제를 대입제도 ‘개혁’이나 교과목 개설(예컨대 빈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식 투자 과목을 커리큘럼에 넣기 - 실제로 유럽에서 있었던 일) 따위로 해결하려 애쓰지 말자는 거다.

할 얘기가 아직 남았지만 이만 줄입니다. 다시 논술 채점하러 가야 해서요.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