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26 18:17
수정 : 2019.11.27 17:47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큰이모 집에서는 늘 냄새가 났다. 다들 고만고만한 살림이었고 너도나도 산복도로 언저리에 숨어들어 살았을 때지만, 이모 집을 찾기는 유독 어려웠다. 어지러운 미로의 극점에 있었다. 어렵사리 찾은 이모 집에서는 입구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났다. 연방 구역질이 치고 올라오는데, 이모는 케케한 김치, 시꺼먼 밥, 뿌연 국을 내놓았다. 환하게 웃는 것만으로도 사라질 것같이 여위었던 이모는 음식을 연신 내게로 밀었다. 철부지 10살이었던 나는 싫다고 하고 이모는 그것도 귀엽다고 힘들게 웃었다. 어머니는 이모를 보고 계속 울기만 했다.
나는 이 냄새를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으면서 다시 기억해냈다. “하층계급에게는 냄새가 난다.” 오웰은 기득권층이 이 세 가지 무시무시한 단어로 하위계층을 제압한다고 했다. 진보를 자처하는 자들은 이 ‘냄새’를 진정한 노동자의 ‘향기’로 이상화하면서도, 실제로 그런 냄새 속에서 살아가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나는 잠시 머뭇하다가 붉은 펜으로 독서의 흔적을 남기고 책을 덮었다. 더 읽을 수 없었다.
이모부는 뱃사람이었다. 일이 거칠었던 만큼 말과 행동도 거칠었다. 술잔도 거침없었다. 그래도 가장 노릇을 한다고 바다에는 부지런히 일하러 나갔다. 그렇게 나가서 돈을 벌어 오는 날도 많았지만, 몸만 망가져서 오는 날도 적지 않았다. 머리가 부서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그물에 끼이고, 갑판에서 떨어졌다. 몇달을 쉬어야 했고, 한해를 훌쩍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산업재해니 보험이니 하는 것은 노동법전 구석 어딘가에 찌그러져 있을 때였으니, 회사나 나라에서 돕는 일도 없었다. 이모가 온전히 살림을 맡았다. 아이 둘은 이모의 살림처럼 떠돌았다. 이모 집의 ‘냄새’도 짙어갔다.
다시 해보겠노라고 일터에 나갔던 이모부는 걸어서 집에 오질 못했다. 병원에 실려가서 온몸의 상처와 고통과 질기게 싸웠다. 이모 집으로 가는 길은 미로였지만, 병원을 찾기는 쉬웠다. 약 냄새로 어지러운 병원에서 이모는 내게 박카스 한병을 내놓았다. 나는 단번에 마셨다. “니 이모부, 힘들 기다”라면서 이모는 그때처럼 힘들게 웃었다. 어머니는 다시 울기만 했다. 이모부는 며칠 후 떠났다. “이 썩을 세상에 만정을 떼고 갔을 기다”라면서 이모는 울지 않으셨다. 문상 온 사람들에게 냄새 안 나는 김치, 밥, 국을 대접했다.
더 이상의 내리막길이 있을까 했지만, 이모부가 죽자 이모의 삶은 또다른 나락이었다. 보상도 없고 보조도 없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니 모든 책임은 이모에게 돌아갔다. 아이들도 지쳐서 떠나고, 필요할 때 가끔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이모가 감당해야 할 몫은 늘었다. 이모는 생계를 위해 몸을 던져 일했고, 그런 만큼 건강은 나빠졌다. 이제 이모는 허리 굽은 병든 노인네다. ‘냄새’는 여전하다. 그나마 건강보험과 기초생활보장이 유일한 생명끈이다.
얼마 전 <경향신문>이 지난해부터 올해 9월까지 산업재해로 사망한 분들, 1200명을 모두 호명해 내었다. 40~50대가 50%를 넘고, 대부분 50인 이하 사업장에서 일하셨다. 우리 이모부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저 많은 분들이 세상에 남겨둔 가족들이 궁금했다. 그들이 견디어 냈을 팍팍한 삶이 그들의 이름 밑에서 훌쩍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일터에서 죽고 다치는 것은 단지 해당 기업과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는 파문처럼, 가족을 지탱하고 있던 것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산업재해의 비용은 우리가 한가롭게 계산하는 것보다 크고 장기적이다. 가족이 감당하지 못하면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지 부담을 나눈다. 내 이모부를 그나마 돕고 내 이모를 지켜준 것은 의료보험이고 사회복지였다. 기업과 정부가 책임지고 산업안전법이 맡아야 할 일을 사회가 떠맡은 것이다.
그렇다. 노동자는 상품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내 이모부처럼 저렇게 수없이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제발 노동자를 상품처럼만이라도 취급해 달라고 하고 싶다. 행여 깨어지고 부서질까 조심스레 포장된 택배상품처럼만이라도.
생각해보니 이모 집의 ‘냄새’를 다른 곳에서 맡은 적이 있다. 산복도로의 맨 꼭대기에 살던 고등학교 친구 집에서였다. ‘김용균’의 나이였던 그가 일하다가 어이없게도 죽고 나서 나는 그의 어머니를 찾았다. 병들어 누워 있던 그녀의 침대에서 바로 그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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