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3 18:02
수정 : 2019.12.04 14:47
우석진 ㅣ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필자는 정책 연구를 꽤 많이 하는 편이다. 전공 분야가 재정학이다 보니 정부가 국민 세금을 잘 쓰고 있는지를 평가하기도 하고, 관련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순전히 학술적인 논문을 쓰기도 하지만, 다수의 연구는 실제 정부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들이 연구용역 형태로 의뢰해오는 것들이 많다. 이럴 때 보통 연구자들은 담당 사무관과 수시로 의견을 교환한다. 담당 사무관이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하는 부분이 있으면 직접 가서 설명해주기도 하고, 함께 보고서를 읽으며 수정을 거치기도 한다.
정책 연구 보고서가 완성되면 사무관들은 다시 상관 보고용으로 요약본을 만든다. 수십, 수백 쪽의 보고서도 숙련된 공무원의 손을 거치면, 15포인트 글자 크기에 A4 용지 한두장으로 요약된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보고 체계상 맨 윗사람은 대체로 50~60대로 노안이 와서 시력이 좋지 않거나 공무로 바쁘기 때문에, 글자 크기는 커야 하고 분량이 많아서도 안 된다. 그 작은 공간에 두꺼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담는 것은 물론이고, 그래픽과 자료의 출처까지 기재된다. 그것이 대통령에게 보고된 보고서라면,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요약에는 능하지만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 작업에서는 공무원들이 비교우위가 없다. 이런 작업은 연구자들이 잘한다. 한두줄의 정책적 질문을 가지고,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 유사한 내용을 주장했는지, 그 주장은 자료로 뒷받침이 가능한지, 외국에는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를 검토하면서 백장짜리 보고서를 생산해낼 수 있다.
그런데 정부 부처들이 세종시로 이주해 간 이후로 요약을 해달라는 사무관들이 부쩍 늘었다. 내용이 전문적이니 내용을 잘 아는 연구자가 직접 요약을 해달라는 것이 명분이긴 하다. 보고서의 전체 요약이야 보고서의 일부로서 당연히 작성이 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급자에게 보고하기 위한 5장짜리 요약, 2장짜리 요약 등 다양한 형태의 요약본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잦아졌다. 심지어 아주 가끔은 국장 보고에 사용되는 양식을 보내주면서 거기에다 요약을 넣어달라는 경우도 있다. 담당 사무관이 해야 할 일을 연구진한테 넘기는 건데 예전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부탁하지 않았던 일이다.
과거에 잘 안 보이던 이런 낯선 풍경은 왜 나타나게 된 걸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사무관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국·과장들이 서울로 출장 와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부 청사가 과천에 있던 시절에는 사무관들이 가져온 연구용역 보고서를 과장들이 즉석에서 수정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관들은 보고서에 대한 요약본까지 스스로 챙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경우, 현장에서 바로 수정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시로 간 이후에는 국·과장들이 서울 출장으로 자리를 많이 비우기 때문에, 직접 보고서를 읽지 않고 요약본으로만 때우려는 유인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이유는 좀 더 심각해 보인다. 공무원을 선발하고 보직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제기다. 학문의 발전에 따라, 10년 전 연구용역에서 사용하던 방법론과 지금 사용하는 방법론은 크게 달라졌다. 평가 방법도 고도화되었고 사용하는 자료도 빅데이터가 쓰이고 있다. 하지만 공무원을 선발하는 방식(행정고시)은 어떤가. 세상은 분야별로 전문화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공무원이 되려고 공부하는 내용은 예전과 거의 다르지 않아 전문 지식과의 괴리가 점점 벌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공직제도는 순환보직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전문가보다는 장차관을 지향하는 일반 관리자를 키우려는 용도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쌓기 전에 다른 보직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용역을 6개월 하는 동안에 담당 사무관이 두 차례나 바뀐 적도 있다. 공무원들이 전문적인 보고서를 읽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인적 자본을 쌓고 싶어도 쌓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 학원에서 정리해준 것과 같은 ‘요약본’을 찾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겠다.
이유야 어쨌든 요약을 부탁하는 사무관이 늘어나는 걸 볼 때마다, 우리나라 공무원의 역량이 퇴보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앞으로는 ‘요약해달라’고 하지 마시라. 윗사람도 요약과 핵심만 찾지 말고 보고서를 읽어 보는 수고를 들이시라.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