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15 18:19
수정 : 2019.12.16 02:36
김누리 ㅣ 중앙대 교수·독문학
예상대로였다. 광주에서 만난 배이상헌 선생은 겸손하고 우직하면서도, 유쾌하고 다감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따스함과 청신함이 확 끼쳐왔다.
도덕 교사 배이상헌, 그가 교단에서 쫓겨난 지도 벌써 5개월이 지났다. 전세계에서 1300만명 이상이 보았다는 프랑스 단편영화 <억압받는 다수>를 성윤리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같이 보며 토론했다는 게 직위해제의 주된 사유다. 성평등을 주제로 한 ‘세계적인 수작’을 수업 교재로 삼으면, 한국의 교사는 ‘성비위범’으로 몰린다. 이렇게 한국의 성교육은 ‘직위해제’를 당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교육의 중요성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수많은 성폭력, 성희롱, 성추행, 성접대 사건을 보라.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이중모럴 사회’다. 공적으로는 너무도 엄숙한 성윤리가 지배하지만, 현실에서는 일상적으로 성이 거래되고 착취되는 사회다. 이런 현실은 무엇보다도 부실한 성교육에 원인이 있다. 한번도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이들이 사는 사회가 오죽하겠는가.
왜곡된 성문화는 어떠한 성(해방) 담론도 공론장에서 논의된 적이 없는 ‘문화지체’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은 ‘성혁명’이라 불린 68혁명의 영향이 거의 미치지 않은 ‘예외 국가’인 까닭에 한국인의 성의식은 보편적인 세계적 흐름에 거의 반세기 정도 뒤처져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성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이중적 성 모럴과 지체된 성 해방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성교육이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약한 자아를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광장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일상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한 한국 사회의 ‘이상한 현실’을 설명해준다. 우리의 자아가 너무도 약하기 때문에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독일 교육의 목표는 성숙한 민주주의자, 즉 ‘강한 자아’를 가진 개인을 길러내는 것이다. 독일에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교육이 곧 자아 교육, ‘강한 자아’를 기르는 교육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프로이트는 ‘자아’, 에고란 슈퍼에고와 리비도 사이에서 동요하는 존재라 했다. 사춘기 때 자아가 형성되는 이유는 본능적 충동인 리비도가 발현되는 이때에 비로소 자아도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을 의미하는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악이라고 공격하면 할수록, 에고는 더욱 깊은 죄의식을 내면화하게 되고, 이렇게 강한 죄의식을 가진, 즉 약한 자아를 가진, 개인일수록 권력 앞에서 더 굴종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이 이른바 ‘권위주의 성격이론’의 골간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강한 자아를 기르는 방법은 분명하다. 올바른 성교육을 통해 리비도의 존재를 악마화하지 않고 당연한 생물학적 현상으로 인정함으로써 ‘죄의식’을 내면화하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내는 것이다. 독일 성교육의 제1원칙이 ‘성을 도덕적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식으로 강한 자아를 가진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이 공동체의 민주적 성숙을 결정하는 요인이기에 성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올바른 성교육은 강한 자아를 만드는 출발점이고, 강한 자아는 성숙한 민주주의의 조건이다.
도덕 교사 배이상헌 사건은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과 야만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제라도 성과 성교육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교육적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성차별을 받지 않고, 성폭력에 희생당하지 않고, 성적 억압을 통해 죄의식을 내면화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강한 자의식과 자아를 가진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은 ‘괴물이 된’ 우리 성인들의 마지막 책무다. 아이들을 우리처럼 피폐한 내면과 어두운 죄의식과 약한 자아를 가진 권위주의적 인간으로 성장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올바른 성교육이 체계적으로 시행돼야 한다. 그것은 배이상헌 교사가 명예롭게 다시 교단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진보교육감’이라는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의 결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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