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31 18:04
수정 : 2020.01.01 16:27
우석진 ㅣ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요즘 직업으로서 변호사가 어떤지 물어보면 당사자 대부분은 변호사업이 매우 힘들고 수입도 예전 같지 않다고 얘기한다. 자녀들에게도 권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의사들도 비슷하다. 의사 수가 많고 정부 규제로 수가가 낮을 뿐만 아니라 신용카드 사용으로 매출도 거의 노출돼 있어 돈벌이가 크지 않다고 설명한다. 물론, 망하는 변호사 사무실과 망하는 병원 얘기도 빼놓지 않는다.
좀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우리 경제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을 믿는다. 경제학의 게임이론에서는 말로 신호를 보내는 행위를 빈말(cheap talk)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하는 데에는 특별한 비용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빈말 게임의 경우, 말하는 사람은 아무 말이나 하고 듣는 사람은 이를 무시하는 이른바 횡설수설하는 것이 균형이 된다. 말에 큰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반면 행동에는 분명한 책임이 따른다. 선택과 행동을 통해 의사결정자의 본모습 일부가 드러난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현시선호(revealed preference) 이론이라고 부른다. 선택을 통해 의사결정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기회가 되면 변호사와 의사의 자녀들은 로스쿨과 의대 진학을 마다하지 않는다. 변호사와 의사의 말대로라면 사랑하는 자녀들의 선택을 말려야 하겠지만 그런 부모는 찾기 어렵다. 변호사와 의사가 우리 사회의 가장 ‘좋은’ 직업임을 손수 선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변호사와 의사 모두 예전 같진 않을지언정 다른 어떤 직업보다 낫다는 의미다. 말은 거짓말을 하지만 행동은 여간해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최근 지역구 세습이 논쟁이 되고 있다. 6선 국회의장의 아들이 아빠의 지역구를 물려받겠다고 나섰다. 당내 경선을 거치겠다고 했지만, 불출마를 선언한 아버지가 닦아 놓은 지역구에 굳이 나서겠다는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지역구 세습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부산 금정구와 동래구에서 5선을 지낸 김진재 의원의 아들 김세연 의원(금정구)이 있다. 홍우준 의원의 뒤를 이어받은 의정부의 홍문종 의원도 있다. 남경필 전 의원은 아버지 남평우 의원의 수원 팔달구를, 정호준 전 의원은 정대철 의원의 서울 중구를 물려받았다.
대를 이어 정치를 하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니다. 정치인의 자녀도 헌법상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고, 정치가 적성일 수도 있으며 정치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정치 영재일 수도 있다. 아니면, 부모님의 대업을 이어받기 위한 운명 같은 선택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국회의원이 좋은 직업으로 선택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더뎌지면서 다른 직업들이 나빠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낙선의 위험이 있긴 하지만 되기만 하면 대박 직업인 것이다.
남은 난관은 당내 공천 과정과 지역 유권자들의 선택이다. 출마자가 신인이라면 공천과 선거 과정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유권자들에게 지지는 고사하고 얼굴 알리기조차 쉽지 않다.
지역구 현역 의원들은 이런 면에서 유리하다. 지역구 유권자들이 현역 의원의 이름쯤은 대체로 들어보았고 의정활동을 알릴 기회도 많다. 한국계 경제학자인 프린스턴대학의 데이비드 리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현역 의원의 선거 프리미엄은 상당한 정도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녀가 부모의 지역구에 출마하면 부모가 쌓아온 정치적 프리미엄을 세습할 수 있는 통로도 열린다. 정치적 프리미엄이 온전히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그 자녀가 누릴 이득이 적지 않다는 것은 명약관화다. 부모의 정치적 자산의 상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역구 세습은 지위 세습의 한 예다. 부의 세습은 아쉬운 측면은 있지만, 상속증여제도를 통해 어느 정도 규제가 되어 있다. 편법을 통해 부를 세습할 수는 있지만 그만큼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지위의 세습은 현행 제도로 통제하기 어렵다. 재벌 총수의 지위가 세습되고, 교회 목사의 지위가 세습되고, 지역 정치 맹주의 지위가 세습되고 있다. 지위가 세습될수록 우리 사회의 역동성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청년들의 도전을 가로막는 지위 세습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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