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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5 19:28 수정 : 2020.01.06 13:22

조형근 ㅣ 사회학자

알레르기 비염에 시달린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봄, 가을 한 달씩 연중 두 달을 지독한 재채기, 콧물, 눈 가려움에 시달린다. 이런저런 치료법도 별무소용, 몇년 전부터는 재채기가 시작되면 무조건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는다.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만 대증요법일 뿐. 그런데 화제의 개 구충제 알벤다졸이 암은 물론 비염에도 특효라는 뉴스가 포털에 떴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유튜브에서 구충제로 비염이 나았다는 경험담들이 화제란다. 드디어 비염 해방의 날이 온 것일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 미국인 말기 암 환자가 알벤다졸 복용으로 암을 완치했다는 증언이 유튜브로 전해진 후 세상이 떠들썩하다. 부작용을 경고하는 의학계의 목소리는 묻혔다. 경고가 먹힐 리 없다. 기적의 구충제에 마지막 희망을 거는 이들이 적잖다. 인지상정이다. 아무쪼록 호전되시길.

인지상정의 공감 너머에 음모론이 있다. 제약회사들과 의료계가 알벤다졸의 효능을 알면서도 값비싼 항암제를 팔기 위해 숨겨왔다는 것이다. 거대한 시장 규모와 제약회사들의 과거 부정 사례들이 음모론을 뒷받침한다. 비염에 특효라는 기사에도 베스트 댓글들이 이 음모론을 설파하고 있다. 그럴 법하지 않다. 자본의 선한 의지를 믿어서가 아니다. 제약회사 임원, 연구자, 의사, 그 가족, 친지들도 암은 걸리기 마련이다. 개 구충제의 효능을 오랫동안 기밀로 유지하기에는 목숨이 위중하고 관련자가 너무 많다.

학계 역시 음모론의 대상이다. 전공이 역사사회학이라 한국사와 겹치다 보니 가끔 지인들이 묻는다. “한국 사학계는 어쩌다 식민사학자들이 지배하게 됐나요?” 난감하다. 재야 사학자나 소설가의 책 몇권,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을 읽고 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믿는다. 주류 사학자들이 대륙을 지배한 한민족의 찬란한 고대사를 고의로 축소, 왜곡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위대한 ‘사실’들을 기록한 사서들을 일제가 모조리 불태운 ‘사실’도 부러 덮고 있단다. 안타깝다. 사실이라면 그 긴 세월 동안 내부 고발자가 없을 리 없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사학계는 국제학계에서 곧잘 과한 민족주의 성향으로 비판받을지언정 식민사관과는 거리가 멀다. 사정을 설명해도 지인들의 표정은 흔쾌하지 않다. 눈앞의 전공 연구자보다는 인터넷의 출처 없는 글들이 더 신뢰받는 세상이다.

음모론은 달 착륙 조작설, 지구 평면설, 지구 인구 감축 프로젝트라는 켐트레일 살포설처럼 허황되어 보이는 것부터 백신의 자폐 유발설처럼 진지하고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까지 다종다양하다.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라서 소위 서구 선진국에서도 추종자가 제법이다. 도처에 음모론이 창궐한다.

왜 이럴까? 실제로 음모가 존재하기 때문일 수 있다. 지배층은 진실을 덮고자 늘 음모를 꾸며왔고, 탄로 난 건 일부일 뿐이라는 믿음이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음모론은 이렇게 드러난 일부 사실에서 출발한 다음 입증 불가능한 거대한 음모로 비약한다. 현대 음모론의 특징은 음모의 핵심에 각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결합해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이들이 전문지식과 기술을 활용해서 대중을 속이고 지배계급에 봉사한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뉴미디어 기술과 만나며 확산되고 있다. 현대의 지식 생산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이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에서 보듯 종종 일부 전문가나 자본이, 권력자가 음모를 위해 결탁할 수 있다. 감시와 토론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전문가 집단 전체나 상당수가 음모에 가담하기는 불가능하다. 착해서가 아니라 인원도 많고, 이해관계도 성향도 다른 탓이다.

전문가 불신에 기초한 음모론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근본적으로 지식의 민주화를 향한 대중의 요구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역사에서 지식은 늘 지배계급의 독점물이었다. 서구와 동아시아에서 대학 교육이 어느 정도 보편화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지식의 생산과 쓰임새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픈 욕망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반면 전문가 집단은 여전히 권위적이고 시스템은 폐쇄적이다. 이 간극에서 음모론이 성장한다. 자율성을 꿈꾸는 전문가 집단으로서는 자본과 국가권력에 이은 또 하나의 참견꾼이 반갑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무릎을 낮추고 귀를 기울여 대화를 나눠야 한다. 자본과 권력 앞에서 자율성을 지키려 할 때 비빌 언덕은 결국 대중의 지지뿐이다. 계몽이 아니라 나누어야 한다. 지식의 힘은 나눌수록 커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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