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03 16:51
수정 : 2007.01.0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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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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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사내는 잿빛 점퍼를 입고 있었다. 머릿결은 오랜 노숙 생활 탓으로 기름때에 엉겨 있었고, 눈빛은 흐렸으며 목소리는 낮고 주눅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등을 돌린 채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김치찌개였다.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숙성된 김치에, 돼지목살이 양껏 얹어져 있었다. 가스불을 켜자 김치와 돼지목살이 서로의 몸을 끌어당기면서, 기어이 웅숭깊은 맛이 배여 나왔다. 저녁의 허기진 위장 안으로, 밥과 국과 한 잔의 술이 밀고 들어왔다.
“혹시 남는 김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일까. 숟가락을 든 채로 숙였던 고개를 돌렸다. 초라한 행색의 중년남자가 주인에게 김치를 구걸하고 있었다. 거절당했는가, 더이상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식당 안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는데, 그때 맞은 편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한 여자가 식당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혼잣말처럼 김치 한 쪽의 인심도 없는 건가, 했던 여자였다. 다시 들어온 여자는 제 식탁 위의 김치를 포장한 후, 계란말이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고, 그것을 들고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거절당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김치와 돼지목살이 서로의 몸을 끌어당기며’ 운운하는 글을 쓰고 있는 이 나는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었는데, 거리로 나오자 갑자기 심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한 사내는 음식예찬을 하며 등을 돌리고 앉아 있을 때, 다른 한 사내는 김치를 구걸하고 있고, 또 한 여자는 구걸하는 사내에게 제몫일 음식을 내주고 있는 풍경. 늦은 저녁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겪었던 작은 사건이지만, 그 밤 내내, 나는 어떤 부끄러움 때문에 목울대가 실룩거렸고, 비계 기름으로 맞춤하게 덮여 있을 위장 속으로 소주를 부어댔다.
연민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연민은 사람의 가장 낮은 수준의 고귀함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밤의 사소한 사건 속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사람됨의 존엄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통과 슬픔에 빠진 사람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고통에 빠진 자를 돕는 일이 같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끼 밥의 존엄은 존엄대로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좀더 고양된 존엄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성 프랜시스대학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8개월 과정으로 노숙인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육코스다. 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한 선배 문인을 통해 그런 학교가 있는지를 나도 알았다. 성공회 산하 노숙인 다시서기센터와 삼성코닝의 후원으로 현재도 약 20여명의 노숙인들이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글쓰기를 배우고 있다. 노숙인들에게 인문학이라니,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 교육의 수준과 학생들의 앎에 대한 열정은 드높다고 한다. 최근에 출간된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미국에서 시작된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와 그것은 유사해 보였다.
왜 노숙인들에게 고급한 인문학을 가르치는가. 사회적 약자이자 체제에서 배제된 이들은, 다만 밥에 굶주려 있는 것만이 아니라 지극한 존재감의 결핍에도 빠져 있다. 인문학은 그 결핍된 존재감을 자기에의 배려와 긍정으로 끌어올리는 에스컬레이터 역할을 한다. 노숙인들은 인문학을 통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행위가 고립된 세계에서 ‘공적 세계’로 귀환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성 프랜시스대학을 수료한 노숙인들은 희망 속에서 다시 공적 세계로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배고픔의 더 높은 단계까지를 생각함으로써 사람의 존엄은 완성된다.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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