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29 17:52
수정 : 2007.01.3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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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국립암센터 의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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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조경란 판사께, 지난번 폐암 소송 판결 때문에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조 판사는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소송을 제기한 한 개인의 폐암이 흡연에 의한 것이라는 입증이 부족하여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인정하신 대로 폐암 원인의 85%는 흡연입니다. 그런데 폐암에 걸린 한 개인이 흡연 때문인지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흡연 외의 폐암의 요인에는 유전적 소인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의 의학적 지식이 짧아서 한 개인이 폐암에 걸릴 유전적 소질을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밖에 모릅니다. 그렇다면 조 판사는 원고들에게 신이 되라는 것인가요? 모든 재판에서 그런 정도의 입증을 요구할까요? 제가 법에 문외한이지만 그렇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석면은 폐암을 일으킵니다. 만약 작업장에서 석면에 노출된 사실이 인정되고 그가 폐암에 걸렸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폐암이 작업장의 석면 때문이었다고 인정하고 산재보상을 받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실은 석면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도 폐암에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연성만으로 이를 인정하고 보상을 해주는 것입니다. 공해나 환경 문제와 같이 여러가지 요인이 개입하고 원인에서 결과에 이르는 시간이 장기간인 경우에는 이처럼 개연성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만약 집 근처에 소음을 일으키는 공장이 있어서 피해소송을 냈다고 해봅시다. 그럴 때 판사가 당신이 집에 거주하는 시간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직장을 비롯한 다른 곳에서 소음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완벽한 증거를 제시하라고 말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이웃집에서 공사를 하다가 벽에 금이 가서 소송을 제기했을 때 지진이나 근처 도로의 차량의 진동 때문이 아니라는 완벽한 입증을 하지 않으면 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요?
여기서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의 차이점을 언급해야 합니다. 형사소송에서는 99명의 진범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연관성이 명백하지 않으면 처벌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사재판은 다릅니다. 99%가 맞겠지만 나머지 1% 명확하지 않은 부분 때문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사법부에서도 개연성만으로 보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담배회사에 85%라도 책임을 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립니다. 흡연이 중독성 질병인지 개인의 선택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조 판사는 부친께서 흡연하다가 폐암에 걸려서 돌아가셨고 남편도 흡연자라고 인터뷰에서 밝히셨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질병통계를 표기할 때 국제질병분류기호를 씁니다. 여기에 의하면 흡연은 ‘담배로 인한 정신적 행동적 장애’라는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니코틴 중독이라는 뜻입니다. 흡연은 중독이기 때문에 의지만으로 금연을 할 수 있는 확률은 5%도 안 됩니다. 이미 세계의 모든 의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부친과 남편이 흡연이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못 끊었던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판결로 많은 흡연자들이 “담배와 폐암 간의 관계가 입증이 안 되었대” 하면서 잘못된 위안을 삼고 있다고 합니다. 담배는 불을 붙여 빨면 질병과 사망을 일으키는 불량상품이 맞습니다.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서 사법부에서 진실을 밝혀주셔야 할 때입니다. 감사합니다.
서홍관/국립암센터 의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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