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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05 17:45 수정 : 2007.02.05 17:45

이영미/대중예술평론가

야!한국사회

우리나라의 극영화나 방송극에서 매우 드문 종류가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법정극이다. 법정에서 사건의 진실과 법리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두뇌 회전과 논리적 언어의 성찬을 만끽하게 하고, 사회에 대한 진지한 사고까지 가능하게 하는 드라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드라마나 영화가 한국에서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기라 불리는 1990년대 이후 십수 년 동안을 통틀어도 이런 법정극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겨우 애써 떠올린 작품이, 강간범의 혀를 물어뜯어 상해죄로 기소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 피고인 원미경을 집요하게 설득하는 변호사 손숙의 꼼꼼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가 인상적이었다)와, 남편의 발기불능이 과로를 시킨 회사 탓이라며 위자료 청구소송을 벌인다는 설정의 코미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 황신혜와 문성근이 부부로 출연한 이 영화의 코미디적 연기의 정점은 회사쪽 변호사로 나온 명계남이다) 정도가 생각날 뿐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두 작품 모두 연극 원작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단지…>는 이윤택 작 <혀>를, <생과부…>는 엄인희의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최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무죄로 판명 나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를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새삼스레 우리나라의 척박한 법정극의 현실을 떠올렸다. 그래, 이런 사회에서 무슨 법정극이란 말인가. 법정극이란 모름지기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논리적 토론이 그 전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물론 1990년대 초반까지(그 이후에는 가보지 못했다) 내가 본 시국재판들은 토론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아니 아예 불가능한 재판이었다. 변호사가 무슨 말을 하건 이미 결론은 뻔히 나 있었다. 안기부 등 고위층을 움직여 어느 정도 형량을 조절하는 인맥 동원 로비가 조금 통했을 뿐 토론은 불가능했다. 법정에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서양 영화의 멋진 법정 장면을 본떠 비슷하게 만들어놓아 봤자 그것은 도저히 현실감이 없는 극이 되는 것이다. 아마 앞에서 거론한 두 작품이 모두 연극에 연원을 둔 것은 영화나 방송극보다는 작위적인 극적 장치나 관행이 조금 많이 허용되는 연극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 재판정의 분위기는, 극 언어에 비유하자면, 냉철하지만 치열한 대화가 아니라 감동적 독백이다. 오로지 그 재판에서 들을 만한 것은 양심수 피고인의 감동적인 최후진술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왜 실정법을 위반하면서 이 일을 해야 했는가를 비교적 길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바로 최후진술 시간이었다. 방청객의 메모 행위가 금지되었던 당시, 학생들은 조를 짜서 재판을 함께 관람하며 그 최후진술을 듣는 즉시 외웠고(누구는 전반부, 누구는 중반부, 이런 식으로 외울 부분을 분담했다), 나오자마자 잊기 전에 문장으로 옮겨 학생들끼리 돌려 읽으면서 감옥으로 간 동료·선배의 귀한 뜻을 기렸다.

그러나 비단 시국재판뿐일까. 방청석 앞자리에서조차 거의 들리지 않도록 웅얼거리고 마는 검사와 판사의 언표 방식은, 우리나라 재판이 얼마나 공개된 대화와 토론의 형식과는 무관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괴물영화까지 나오는 ‘한국 영화의 기적’을 이룬 이 시절에도 법정극이 유행하지 않는 것을 두고 예술가의 상상력 탓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영미/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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