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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12 17:06 수정 : 2007.02.12 17:09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야!한국사회

1970년대 미국에서는 ‘강간죄 개혁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바 있다. 그 운동의 영향으로 미국 내 다수의 주 형법에서는 ‘피해자의 저항’ 조건이 폐기되면서 피해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항했을 때만 인정되던 강간죄가 폭행이나 협박의 정도에 관계없이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미국의 70년대 이전 상황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형법에서 강간은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되어 있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피해자의 ‘저항’이 있어야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입장은 성폭력이 성적 자기결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정조의 문제라고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강간죄를 비롯한 모든 성폭력을 이런 관점에서 보는 시각은 여전하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여성이 목숨 걸고 저항하지 않으면 피해자로 인정받기 어려울뿐더러 오히려 ‘꽃뱀’으로 의심을 받기도 한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자의적으로 판단함으로써 성폭력을 저지르게 된다. 밤늦게 강변 둔치를 혼자 서성이거나 첫 만남에 술을 함께 마신 것,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함께 있거나 키스를 한 것 등을 섹스에 대한 동의로 판단하는 것이 그 예다. 특히 서로 아는 사이일 경우 상대방의 ‘눈빛’이나 ‘분위기’를 보고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 가해자가 느끼는 억울함은, 자신의 행동은 ‘성폭력’이 아닌 ‘성관계’라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여성이 ‘적극적 저항’을 하지 않는 성행위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파악하는 한국 사법부의 시각도 성폭력 가해자들의 시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쌍방의 자율적 결정에 따른 합의만이 성관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성관계에 대한 합의의 기준은 철저히 두 사람의 결정과 결정이 만나 조정되는 과정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폭력 가해자들에겐 이 과정이 배제되어 있다. 상대방의 의사를 묻는다거나 기분이나 감정에 귀를 기울인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을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더 많다. 성행위를 소통의 문제가 아닌 남자로서의 능력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기습 키스나 일방적 구애를 청춘의 낭만으로 포장하고 미화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몇 해 전 ‘강간죄를 개혁하라’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한 방송사 시사프로그램에서는 성폭력을 다루는 한국과 미국의 시각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한 바 있다. 만취한 처제를 강간한 형부에 대해서 한국 사법부는 예의 ‘적극적 저항’ 논리를 들어 피의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판결문을 미국의 현직 판사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는 피의자에게 유죄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피해자의 ‘적극적 저항’이 아니라 ‘적극적 동의’를 중요한 요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격한 시각 차이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양자 간의 판단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성적 자율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얼마 전 여성인권법연대가 ‘동의 없는 성적 행동’에 대한 처벌을 골자로 한 성폭력 관련 형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물론 개정안에서 내세우는 ‘동의’의 정의와 외연을 두고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동의’ 자체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폭력 구성 요건으로 ‘동의 없는 성적 행동’의 의미가 뜨거운 쟁점이 될 것 같다. 이를 계기로 70년대 미국의 강간죄 개혁 운동과 같은 변화를 기대해 본다.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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