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2.14 17:38
수정 : 2007.02.1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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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평론가 <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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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칼럼을 쓰다 보면, 간혹 엉뚱한 제안이 들어오기도 한다. 글을 참 잘 읽었다, 꼭 만나서 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 독자의 전화에 감사를 표하기는 하지만, 만나는 일은 피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 날은 거절을 못했다. 수시로 오는 전화를 감당하지 못한 것도 있고, 그런 독자의 진심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남의 결과는 역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 독자는 나에게 대필을 요구했다. 유력한 정치계 인사를 알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자신 역시 정치적 야망이 있는데, 책을 내고 싶다는 것이다. 정치 홍보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일 것이다. 사례도 충분히 하겠다는 말이 곁들여졌다. 내 마음속에서 미세한 기포가 점점 커지더니, 참을 수 없을 지경으로 들끓어 올랐다. 편히 내려가시라며 벌떡 일어섰다. 문사의 자존도 한심했던 오후였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역경에 처할 것이 예상되는데도 발언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사적인 이해관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의제들과 관련된 것이고 또 ‘약자의 아가리’를 대신 열어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함께 발언해야 한다. 근대 이후 그 발언의 몫을 짊어진 것은 문인과 기자들이었다. 문학과 언론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이자 시민적 의사개진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공론장이었다.
그래서 문학과 언론은 함께 검열당하거나 억압당했지만, 도리어 이에 저항하고 자유를 실천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가장 중요시했던 것의 하나가 언론자유였다. 그런데 오늘의 문학이 사소해진 것처럼, 오늘의 언론은 무력해져가고 있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억압이 사라지자, 날것의 자본이 기자들의 일용할 양식을 저당잡아, 그들의 펜촉을 무디게 하고 있다. 공론장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힘센 언론사는 외눈박이처럼, 힘있는 자가 보라는 대로 보고 있다. 반면 두 눈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겠다는 기자들은 거리로 내몰려 있다. 내몰려 본 자는 안다. 그 황량한 무력감과 들끓는 분노와 어이없음과 수시로 떠오르는 회한들을. 정치적 올바름과 윤리적 정당성과는 무관하게 역시 한 세상이 돌고 또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의 실현. 모난 돌이 정 맞는다거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패배주의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처세담화의 절정을. 절이 아니라 주지가 문제인데, 외눈박이의 눈은 주지를 보지 않는다.
〈시사저널〉 기자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시민의 신문〉 기자들 역시 거리에 서 있다. 그들은 모두 한국사회의 뾰족한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기자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모두 역경이 예상되는데도 문제제기를 해야 했던, 약소자들의 아가리를 열어주었던 기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 자신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성숙한 시민사회라면 문제제기에서 그치지 않고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시민사회의 존재근거다. 내가 특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시민의 신문〉 사태를 둘러싼 시민운동 진영의 직무태만이다. 이 신문은 시민단체 공동신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신문의 저명한 이사들, 시민운동의 리더들조차 문제해결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내부적 문제라고 해서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거나 서둘러 꿰매는 것은 윤리적 태도가 아니다. 성숙한 시민운동은 문제의식의 치열함을 문제해결의 현명함과 결합시켜야 한다. 〈시민의신문〉 사태는 이 문제 해결 능력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상처를 방치하여 썩게 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려내서 새살 돋게 해야 한다.
이명원 /문학평론가 <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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